故 최수복 권사를 그리며… 림인식·림형석 父子목사의 못다한 사부곡&사모곡미수(米壽)의 늙은 목사는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가 그립다. 회갑(回甲)을 맞은 그의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한국 최초의 4대 목회자 집안의 며느리와 사모로, 어머니로 살다가 지난달 초 소천한 고(故) 최수복 권사의 남편 림인식(88·노량진교회 원로) 목사와 장남 림형석(61·평촌교회 담임)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부자(父子) 목사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아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나의 아내여 나의 천사여…”#림인식 목사의 사부곡(思婦曲) 림인식 목사를 만난 건 지난 7일 오전 서울 흑석동 자택에서다. 거실 식탁 앞에 앉은 림 목사 뒤로 그의 5남매 자녀들의 가족사진이 좌우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시 127:3)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 한가운데 최 권사의 사진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장례식만 수백 번 집례하면서 여러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내 아내를 보내는 건 기분이 또 달라. 다르더라고….” 그는 휴지를 뽑아 붉어진 눈시울에 갖다 댔다. 아내에게 그는 어떤 남편이었는지 궁금했다. “평생 꽃다발 한 번 사들고 집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남편이었죠. 가정적으로는 낙제점일 거예요.” 림 목사는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20년 동안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던 얘기부터 꺼냈다. “목회 초기 때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목사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책 살 돈이 많이 부족하니까 좀 이해해 달라’고….” 그는 교회로부터 월 사례비를 받는 날이면 지게에 책 꾸러미를 가득 싣고 집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림 목사 부부가 63년 동안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 덕분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요. 서로의 성장 배경만 봐도 아내는 부잣집 딸이고, 나는 가난한 목사 아들이었죠. 나는 동적이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런 걸 싫어했고요. 체질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서로 달랐어요.” 서로 같은 점이라곤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고 했다. “목회였어요. 아내는 목회자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나를 만났어요. 그리고 나의 목회를 위한 일이라면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서로 다른 부분이 100가지가 넘어도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우리 부부를 꽁꽁 묶어 준 셈이지요.” 최 권사는 남편 설교에 대해서도 “당신 설교 너무 길어요. 설교내용이 너무 어려워요”라며 달고 쓴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장례식 예배에서 그는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천사였소”라고 고백했다. 림 목사는 그러나 아내에 대한 빚진 마음이 여전한 듯했다. “목회일변도의 제 삶 때문에 아내가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요. 남편이 알지 못하는 고민도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내를 위해 해준 일도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림 목사는 6∼7년 가까운 아내의 투병기간 동안 병시중을 도맡았다. 생전의 최 권사는 당뇨병과 파킨슨병, 신장병 등 많은 질환을 앓았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20년 동안 생활비 안 줬던 것도 그때 다 용서해줬을 거예요(웃음).” 림 목사 어깨 너머의 사진 속 아내 모습에서도 엷은 미소가 비쳤다. “어머니 목소리가 그립습니다”#림형석 목사의 사모곡(思母曲) 아들이 생각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는 가정예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일 경기도 안양의 평촌교회 집무실에서 만난 림형석 목사는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형석이는 대(代)를 이어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 달라’던 어머니의 기도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교회 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가정예배는 저녁에 어머니가 인도하실 때가 많았어요. 동생들과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던 습관이 우리 가족 모두의 삶 가운데 깊이 각인된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의 기도대로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목회를 안 했다면 오히려 더 막막했을 겁니다.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던 기도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5명의 자녀를 두셨으면서도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셨어요. 가래떡 하나를 먹을 때도 5등분으로 나눠 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어머니는 나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믿음이 확고했어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역만리 자식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민 목회 시절이었어요. 개척한 교회가 성장하고 제법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중 20년 만에 덜컥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죠. 어머니가 ‘우리 가까이서 지내자’고 말씀하시는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림형석 목사는 3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목회를 했다. 담임을 맡았던 미국 LA의 선한목자장로교회는 60여명이던 성도가 700여명까지 증가하는 등 큰 부흥을 이뤘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이 그립다고 했다. “20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요. 위로가 되고, 힘도 나고….” 그의 넋두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풍수지탄(風樹之嘆)의 마음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http://www.ccnanum.org/bbs/board.php?bo_table=tb12≀_id=3398
2013.5.30일, 동아일보 2면 톱기사에 ‘모나미 볼펜 출시 50주년’에 대한 기사가 났다.
모나미 볼펜은 1963년 5월 1일에 출시되었다. 지금까지 50년 동안 36억 자루가 팔렸다. 그걸 길게 늘여 놓으면 지구 열두 바퀴를 돈다고 한다.
모나미 볼펜의 송상석 사장이 장로다. 회사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했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아이디어를 얻고 기술을 배워서 1년 만에 모나미 볼펜을 시작했는데 왜 모나미 볼펜의 상호가 153인지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요한복음 21장 11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백오십삼마리 잡혔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더라” 가득 채웠는데도 찢어지지 않았다. 153이라는 로고의 숫자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송 장로 가정은 주일마다 자녀들이 모두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로 나온다고 한다.
송장로는 기도에서 1.믿음의 자녀로 나서 주일성수 않은 것 2.십일조 않은 것 3.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요한복음 22:11을 찾았다.
송장로는 세계 모든 사람들 손에 153볼펜이 들려지기를 기도했다. 당시 세계 인구 50억 자루가 팔리기를 기도했고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ㆍ인생 순례길 ‘지혜의 지도’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이 오래된 찬송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나도 가사처럼 성경과 처음 만났다. 어떤 이는 BIBLE(성경)의 앞글자를 가지고 ‘Basic Information Before Leaving Earth’라는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이 땅에 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내게 성경이 그랬다.

도지사에 취임한 후 나는 선언했다. 공식 일과가 시작되는 9시 이전에는 회의를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이른 아침 나만의 시간을 갖지 않은 채, 일정에 맞춰 살다 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 한 구절을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하루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날이 된다.

성경 중에서도 특히 시편과 잠언은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준 스승이다. 물맷돌 다섯 개로 적의 장수와 맞붙은 소년 다윗의 인생은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다윗의 마음이 되어 시편에서 위안을 얻는다. 도지사가 된 후에는 솔로몬의 지혜서인 잠언을 자주 읽게 되었다.

왕에게 쫓기며 기나긴 광야생활을 하다가 왕이 되었던 다윗, 떨리는 무릎을 딛고 일어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리더들의 이야기, 절망에서 인생을 개척해 내는 야곱과 요셉, 지혜의 왕 솔로몬 등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은 오늘을 사는 내게 나침반과도 같다.

성경은 내게 ‘앎’에서 머무르지 않고 ‘삶’을 살아 나가라고 말한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순례길에 ‘성경’이라는 지도를 하나 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512032227465

김용만, 아프리카 오지마을에 태양열 랜턴 보내기! 뮤지컬 ‘방향’ 노개런티 참여…스타인헤븐

국민일보 2015.11.20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084510&code=61221111&cp=nv

하늘나라택시운전사 승리의노래 가수 이병우집사 대전혜성교회 전도간증 20131027

 

세 번의 자살 시도 후에도 죽을 방법만 찾던 군포사는 택시기사 이병우. [옥경이] [칠갑산] 만든 유명한 음악가 사랑의교회 조운파집사의 전도로 예수를 영접하고 전도자가 된다.
조운파 집사의 권유로 가수로 데뷔해 [승리의 노래]를 부른다.

전국을 다니며 간증을 하는 택시기사 가수 이병우 집사의 대전혜성교회 간증

www.jesusnews.kr

 

 

세 번이나 자살하려던 사람

택시운전을 하다가 하나님을 만나 전도왕이 된 이병우 집사

군포시민이 되고 만난 [칠갑산],[옥경이]의 작사,작곡가 조운파 집사의 권유로 예수를 믿고 가수가 되어 세 번째 인생을 산다.

전국을 다니며 집회를 통해 간증하는 삶이 감사하다는 이병우 집사

군포에 살고 사랑의교회를 섬기고 있다.

 

http://tvpot.daum.net/v/w0PmeCdNWDw%24

 

네이버동영상 cbs 새롭게하소서

http://blog.naver.com/dfgiyo?Redirect=Log&logNo=140054495713

[1] 빚더미에 앉은 무능한 영업사원에서 연 수입 1억 엔의 일류 영업사원으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로5:3~4) 


1. 벼랑 끝까지 몰리고 만 최악의 사채 경험
2. 순조롭던 생활에서 뛰쳐나오다
3. 풀 커미션 세계에서 절벽으로 내몰리다
4. 생활수준을 낮추지 못해 빚을 계속 늘리다
5. 아버지의 말씀이 일깨워준 것
6. 하루에 한 명을 만난다는 규칙
7. 일주일에 한 건 계약이라는 나만의 페이스를 만들다

 
[2] 무능한 영업사원이었던 내가 변할 수 있었던 계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7:7~8)


1. 하루 한 명, 일주일 한 건,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법
2. 3보 전진에 2보 후퇴
3. 악순환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영업사원에게
4. 자신이 파는 상품에 대해 깊이 공부한다
5. 영업사원은 자신의 상품을 사랑해야 한다
6. 지식을 늘림으로써 고객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다
7. 상담자가 되는 것이 호순환으로 가는 길

 
[3] 거절당하는 괴로움은 목표를 바꿈으로써 극복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8) 

 

1. 상사가 싫은 소리를 해도 흘려듣고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다
2. '거절당하는 괴로움'이라는 큰 문제
3. 목표를 바꾼다
4. 다음에는 문을 열어주기를 바라기 시작하다
5. 영업 활동 자체를 즐거운 모험으로 생각하다
6. 괴로움이 쌓이면 잠시 쉬도록 하자


[4]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기술을 몸에 익힌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1. "계약을 따낼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는 말을 들었다면
2. 고객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본다
3. 원하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사준다
4.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기술
5. '언젠가는 크라운....!'에 숨겨진 영업 비결
6. 사람은 ‘필요한 단계’를 위해서는 돈을 쓴다

[5] 자신의 장점은 무엇일까?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마가9:35)


1. 어떤 마음가짐으로 고객을 상대하고 있는가?
2. 자신의 좋은 점을 발견해 남들에게 봉사한다
3. 자신의 장점은 무언인가?
4. 사생활과 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5. 부자 고객을 상대할 때 중요한 점


[6] '우선하는 규칙'을 만든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8)


1. 자동차를 좋아하니까 자동차 판매점으로 영업을 나간다
2. 영업을 하기 전에 친구, 지인이 된다
3. 고객은 부모 형제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해 본다
4. 반드시 사후 봉사를 우선한다는 규칙을 만들다
5. 요령이 없어도 일관성을 유지하면 신뢰로 이어진다

[7] 회사가 판매하는 상품을 좋아하자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마10:19)

 

1. 회사가 판매하는 상품을 좋아하도록 노력하자
2. 위태위태한 생활 속에서 생각한 것
3. 이런 영업 방식으로는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다
4. 열의는 반드시 전해진다
5. 이토 스페셜이라는 상품을 독자적으로 설계하다
6. 상품은 '팔면 끝'이 아니다


[8] 영업처의 고객이 가르쳐 준 것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시30:5)


1. 영업처의 고객들이 가르쳐 준 것
2. 약속을 한 번 거절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3. 먼 훗날의 약속을 늘리는 것이 성공률을 높인다
4. 반년, 1년이라는 시간이 고객의 환경을 바꾼다
5. 일곱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린 바보 같은 방문 영업사원
6. 비가 오는 날 주택가에서 만난 개구리 아저씨

[9] 계약은 종착점이 아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16:10)


1. 계약은 종착점이 아니다
2. '영업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라는 규칙
3. 법인을 대상으로 한 영업 방법
4. 핵심 인물을 돕는 것을 첫 목표로 삼는다
5. 운 좋게 성사시킬 수 있었던 계약은 위험 신호다
6. 업무의 기둥이 되는 규칙은 무엇인가?
7. 자신의 장단점을 파악해 자신만의 방식을 만든다

[10] 변명보다 먼저 사과를 한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사52:11)


1. 변명보다 먼저 사과를
2. 상대방의 착각, 분노에 대해 변명을 하지 않는다
3. 화를 내는 사람에게는 먼저 사과를 한다
4. 평소에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훈련을 거듭한다
5. 사과와 감사의 말로 영업사원으로서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다
6. 용서가 결과적으로는 실적 상승으로 이어진다

독일인의 90프로가 다이히만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발을 떠올린다


 "벌 수 있는 한 최대로 벌고 할 수 있는 최대로 절약해서 줄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눠 주자" 라는 웨슬리의 말을 실천하는 사람 하인츠 호르스트 다이히만


 내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내게 얼마나 많은 신발을 팔았느냐고 묻지 않으실 겁니다 그분은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지 복음을 전파했는지 물으실 겁니다

안양호스피스선교회 www.ayhospice.kr.to

한국호스피스협회 경기남지회 소속

암환자들의 벗이 되고자 기독교계와 의료계(메트로병원)로 구성된 초교파적 연합선교단체.

사무실 :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 342-105 메트로병원내

031-384-5060

www.ayhospice.kr.to

http://cafe.daum.net/rodamtree7

경기도의회 기독의정회는 과천중앙교회 장로 이해문 의원이 회장이다. 회기가 열리는 날 아침 8시 60여명의 회원들은 도청 신우회와 번갈아가며 예배를 주관한다.

100번째 추석 맞는 개신교 최고 어른 방지일 목사의 삶과 꿈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우리나이로 올해 100세를 맞은 방지일 목사는 한국 개신교계의 ‘최고 어른’이다. 1937년 평양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으니 올해로 74년째다. 방 목사의 일생은 한국 개신교는 물론 한민족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중앙SUNDAY가 방 목사를 만났다.

올 6월 미국 뉴욕주 서펀에서 열린 방씨 가족 수련회 기념 사진. 방씨의 조부 아래 7세손까지 모두 130명이 모여 가족모임이란 말대신 ‘수련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방지일목사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6월 28일 미국 뉴욕 북쪽 서펀이란 작은 마을의 홀리데이인 호텔에 한국인 130명이 모였다. 이들은 30일까지 2박3일 동안 하늘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오리엔테이션·특강·골프대회·새벽기도·예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언뜻 봐선 여느 한인교회 수련회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이 행사는 교회 수련회가 아니라 ‘가족 수련회’다. 티셔츠에는 큰 나무 그림 옆에 ‘the Pang Family’(방씨네)란 글이, 행사장 플래카드엔 ‘Retreat for the Descendants of Father manjoon Pang’(방만준 할아버지 후손 수련회)란 글이 쓰여 있었다.

방지일 목사는 10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시간30분이 걸린 인터뷰 내내 활기찼다. 신동연 기자
모임의 주인공은 올해 우리나라 나이로 100세(1911년생)를 맞은 방지일 영등포교회 원로 목사. 방 목사의 할아버지 방만준씨의 후손 중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집안 최고 어른인 방 목사의 100세를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방 목사의 조부로부터 7세손까지 이어지다 보니 가족 모임이라고 하기엔 워낙 대규모라 ‘모임’ 대신 ‘수련회’란 말을 사용했다. 수련회는 다른 호텔의 일반 모임과 마찬가지로 ‘등록’과 ‘이름표 배부’로 시작했다. 130명이나 되는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기는 처음이라, 서로 얼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130명 미국 가족 중엔 목사 20명, 장로 16명, 권사 16명, 의사 17명, 교수 13명, 판사 2명, 회계사 3명이다. ‘속세’와 ‘종교계’ 어느 쪽 기준이든 복받은 집안이다.

중앙SUNDAY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방 목사를 만났다. 그는 한국 개신교계의 ‘최고 어른’이다. 일제 치하인 1937년 평양 조선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으니 올해로 74년째다. 방 목사의 일생은 한국 개신교는 물론 한민족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조부 방만준씨는 한국 개신교의 1세대다. ‘제사 안 지내는 예수쟁이’라는 핍박을 받아 고향(평북 선천) 마을을 떠나야 했다. 부친 방효원씨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목사가 된 후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방지일 목사는 신학생 시절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아가며 성경 모임을 만들고, 교회를 세웠다. 1937년,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다. 중일전쟁 뒤 중국 땅에서도 일제의 문화·종교 정책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방 목사에겐 감시와 핍박이 계속됐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이번엔 공산당의 감시와 통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당시 심정을 ‘어항 속 물고기’라고 표현했다. 방 목사는 서구 선교사들이 모두 떠난 중국 땅에서 유일하게 남은 외국 선교사였다. 당시 중국 정부는 방 목사를 북한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다행히 당시 서구 언론에 ‘공산 중국 땅에 마지막 남은 외국 선교사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957년 간신히 서울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귀국 후 1979년까지 영등포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요즘 서울 등촌동의 한 시니어타운에서 홀로 살고 있다. 부인은 6년 전 세상을 먼저 떴다. 자녀는 모두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방 목사는 그간 시무해온 영등포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그래서 택한 곳이 교회에서 가까운 시니어타운이다. 방 목사는 혼자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를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또 다른 원로 목사가 있다. 2005년 영등포교회 담임목사직을 은퇴한 김승옥 목사다. 김 목사도 고희를 넘긴 71세지만, 아버지뻘인 방 목사를 모시느라 항상 ‘젊게’ 살 수밖에 없다. 김 목사는 방 목사의 후임 담임목사였다. 지난 10일 오전 10시 인터뷰 때도 먼저 와 취재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들 같으면 대접받을 연세에 더 원로인 목사님을 수행하시느라 힘드시겠다”고 하자 김 목사는 준비된 듯 거침없이 답했다. “제가 도리어 영광입니다. 방 목사님과 같이 다니니 더불어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방지일 목사 기념사업회’의 부이사장이기도 하다.

올해 100세의 방 목사는 다리가 불편해 휠체어와 지팡이를 번갈아 사용하긴 하지만 나이에 비해 무척 건강했다. 기자가 목소리를 조금 높여 인터뷰를 진행했다. 방 목사는 아직도 남아 있는 평안도 억양으로 ‘쩌렁쩌렁’ 답했다.

71세 김승옥 원로목사가 수행
-건강 비결이 뭡니까.
“없어요. 막 살아요. 있는 대로 주는 대로 먹습니다.”
옆에서 김 목사가 부연 설명했다. 고기와 채소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먹는데 일반인과 비교하면 아주 적게 먹는다고 한다.

-그래도 건강을 위해 꾸준히 해오신 운동이라도 있으실 텐데요.
“없어요. 젊어서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운동할 시간이 없었어요. 나이 들어서는 매일 새벽 일어나서 욕조에 물 조금 받아두고 발로 바닥을 치는 것을 한 시간 정도 하는데 운동이라면 그게 운동입니다.”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오후 10시에 잠들어 오전 2~3시에 일어납니다. 새벽에 일어나면 목욕을 하고 이어서 기도와 성경 외우기를 합니다. 4년 전만 하더라도 교회 새벽기도에도 갔는데 이젠 혼자서 가긴 힘들어요. 식사 시간인 오전 7시가 되기 전까지 e-메일도 체크하고 답장도 보냅니다. 책도 읽고요. 그러다 졸리면 한숨 붙이기도 하죠. 낮엔 사방에서 오라는 데가 많아서 별로 쉴 틈이 없어요. 그렇게 하루가 갑니다.”

100세 노인은 매일 e-메일을 쓴다. 인생 90년 동안은 e-메일이라는 걸 상상도 못했다. 세계 곳곳에 있는 선교사·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데 e-메일만큼 편한 게 없다고 한다. e-메일로 누군가에게서 좋은 사진을 받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퍼나르기’도 한다. 방 목사는 아침 식사 전까지 매일 1~2시간을 인터넷으로 세계를 누빈다며 컴퓨터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웹메일을 확인하려고 비밀번호를 넣는데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김 목사, 이거 왜 안 되죠? 새벽까지만 해도 됐는데?” “어, 그러게요. 목사님,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머리가 허연 두 원로 목사가 컴퓨터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전히 설교나 강연을 하신다면서요.
“바빠요. 월요일엔 여기서 목사님들 모아놓고 성경 공부하고, 수요일엔 도곡동에 가서 4시간 동안 성경 강의합니다. 목요일엔 어린이 선교회 사무실에 가서 또 성경 공부를 합니다.”

여기까지는 매주 공식 스케줄이다. 사실 방 목사가 쉬는 날은 없다. 화·금·토·일, 어느 날이라도 각종 초청 강연 등으로 일정이 빡빡하다. 이날 약속된 1시간30분 인터뷰도 여유가 없었다. 끝날 시간이 되자 다른 손님들이 벌써 소파에 앉아 방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힘드시지 않나요.
“괜찮아요. 녹스는 게 두려울 뿐 닳아 없어지는 건 두렵지 않아요.” 북녘 땅과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목회 활동을 해온 방 목사 평생 삶의 신조다.

-최근 우리나라 사회에서 개신교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습니다. 원로의 입장에서 한국 개신교의 현실을 진단한다면.
“한국 개신교의 역사가 100년을 넘겼어요. 과거 초기엔 가정과 사회에서 박해를 받아가며 교회를 다녔는데, 요즘은 너무도 편해졌습니다(교인들이 너무 안일하고 나태해졌다는 뜻). 교파도 너무 많이 갈라졌죠.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만 해도 장로교가 하나였는데. 신앙의 차이라기보다는 자리 다툼의 성격이 크다고 봅니다. 우리 개신교의 잘못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이만큼 발전한 데는 교회가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개신교의 본령은 사회공헌이나 복지사업이 아니라 속죄구령(贖罪救靈·죄를 면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개신교는 그간 어느 단체보다 사회의 복지사업에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부정적인 모습만 가지고 전체 개신교를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어두운 밖에서 보면 밝은 집안의 시시콜콜한 모습까지 모두 보이는 법입니다. 최근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정반합(正反合)을 얘기한
헤겔의 변증법적 시각으로 보면 될 겁니다.”

-개신교 최고 원로 목사로서,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그걸 왜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말합니까. 할 말이 있으면 직접 개인에게 해야지. 공개적인 방법으로 충고하는 건 아주 나쁜 일입니다. 내가 대통령과 같이 있다면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장점을 칭찬하고 격려해줄 겁니다.” 실제로 그는 종종 청와대를 찾아 대통령과 대화를 나눈다. 이 대통령이 속한 교회와 같은 교단이어서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잘 알던 사이이기도 하다.

6년 전 부인과 사별, 시니어타운서 생활
-추석 때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자식 걱정이 첫째 화제입니다. 요즘 청년 실업이 심각한데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업을 못 구한 청년들, 그런 젊은이들을 뒷바라지한 부모들, 모두 안타깝습니다. 청년 실업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죠. 서구 선진국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지만 현실이 어렵다고 한탄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부지런히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일자리가 없다고 난리인데, 외국인 노동자는 왜 이리 넘쳐납니까. 우리 청년들, 배운 게 많다고 그런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아닙니까. 벼가 추수를 맞을 때까진 태풍에 쓰러지고 꺾이는 시련을 겪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놀아서는 안 됩니다.”

-그간 살아오신 100세 평생을 스스로 평가하신다면.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는데 여전히 부스러기가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괴롭고 가슴 아팠던 일도 있었을 텐데요.
“가슴 아팠던 일이라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겁니다. 중국 선교를 할 때 일본 사람들에게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 나를 무던히도 어렵게 했습니다.”
중일전쟁 후 일본의 중국 지배가 본격화했을 당시의 일이다. 일제는 중국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의 하나로 ‘대동아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수십 명의 일본인 목사를 중국에 파견했다. 그들은 선교사업이 여의치 않자 ‘내선일체’를 구실로 방 목사를 찾아와 자신들의 선교회에 가입할 것을 강요했다. 방 목사가 이 제안을 거절하자 일본인 목사들은 방 목사를 비롯한 한국인 선교사들을 비방하고 고발하기까지 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공산 치하의 중국에서 선교하던 겁니다. 일본 사람들도 나를 어렵게 했지만 중국 공산당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공산당은 우리를 무섭게 핍박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엔 공산당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로 경험해본 나는 잘 압니다. 이 사람들 치밀하면서 무서워요.”

인터뷰를 마치고 현관문을 나서는데 방 목사가 취재진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거~, 교회 다니시오!”


최준호 기자

신앙으로 타인과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펼쳐나가는 박수균 대표이사

2010년 07월 16일 [(주)경기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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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경기헤럴드




경천애인으로 이타(利他)행을 몸소 실천하는 박수균 대표이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든 순간에 종교에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한다. 종교가 우리에게 주는 힘은 과학적이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발휘해 낼 수 없는 오묘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생활을 통하여 신앙적 체험을 종교안의 기적으로 쌓아가며, 감읍한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되돌려주는 (주)쎄미존 박수균 대표이사


▶성숙한 정신세계를 접하다.
아름다운 노을빛 아래 아무것도 거침이 없는 넓은 평야로 지평선을 이루는 익산시가 그의 고향이다. 특히 그가 살던 마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논밭이어서 석양의 연출은 언제나 가장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었다.
부농의 5남매 중 셋째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귀염을 독차지 했고, 인심이 후한 마을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어질고 착한 인성을 배우며 성장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에 이미 주산3단을 취득하여 주위 어른들과 친구들에게 ‘수학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영재성을 보였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좋은 성적으로 반 순위가 아닌 전교 순위를 항상 차지하여 집안에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
그의 기독교 신앙생활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찮게 처음 교회를 나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에게 교회 안에서 성경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보다 살아가는 이치와 가치를 하나님 사랑 안에서 이웃사랑실천과 복음을 통한 아름다운세상 구현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예수님사랑이 곧 자기에게 충실한 삶이며 올바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고교시절 내내 착실한 신앙생활로 정신적 성숙을 채워갔다. 일상의 즐거움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로 겸허하고 공손함으로 다듬어지고, 성실한 종교생활은 매사 긍정적인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으로 참여하는 신앙인이 되게 했다.
심지어 대학입학을 앞두고 있는 가장 중요한 시기 고3때에도 주말에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자전거를 타고 교회와 집을 새벽시간에 왕복하며 주일을 지킬 정도였다.
대학 입학 후에는 찬양대의 지휘자를 맡으면서 더욱 독실한 신앙생활로 대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하나님에게 받은 은총에 진정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는 찬양대의 지휘를 맡았고, 일상은 대학시절 내내 전자공학을 전공하는 평범한 대학생 독신자로서 임했다.

▶ 믿음은 성공의 지름길이다
공군학사장교로 입대한 그는 기술직이 대부분인 공군의 특성상 직장인과 같은 학사장교 생활로 복무를 마쳤다. 덕분에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전역 후 삼성, 한화, 대우 등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에 취업원서를 접수, 모두 합격하여 회사를 골라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대우반도체에 입사하면서부터 군포시에 입성했다. 직장에서도 다른 입사동기와는 다르게 대리에서 과장으로,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남들보다 1년 먼저 앞서갔다. 일하는 동안 해외 유명회사만 낼 수 있다는 반도체 구조특허를 비롯한 다양한 연구·개발 성과를 올려 나름대로 탄탄한 직장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모든 생활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준 은혜의 덕’으로 돌리고 있다.
사실 그는 회사를 다닐 때에 ‘새벽기도 총진군’이라는 프로그램’에 참가했었는데, 새벽을 여는 그 프로그램은 만사를 기대와 기도의 소망으로 보낼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높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직장생활 근무 중 자신도 사업을 하고 싶어 마음이 맞는 입사동기들과 창업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국의 실바코라는 회사의 회장이 자신이 개발한 반도체 구조특허를 보고 스카웃 제의를 해와 그는 1년6개월 동안 미국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실바코에서의 생활을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웠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 지금의 ‘쎄미존’ 이라는 회사를 창업, 반도체 부속품제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부속품제작업을 하다 보니 반도체를 만드는 설비에도 관심이 생겨 제품에 관련된 설비회사 설립과 함께 이제는 핸드폰과 LCD에 들어가는 친환경점착테이프를 만드는 회사까지 설립, 운영하는 기업가로 거듭났다. 또한 회사들을 운영하면서도 꾸준한 연구로 특허를 내고 새롭게 창업신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사실 꾸준히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여러 개의 회사를 운영하다보면 정신없이 바쁘고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사업번창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고 자신의 믿음은 더욱 굳건한 반석이 된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항상 하나님은 나를 위해 성공하는 길을 준비해 놓고 계신다’는 강한 믿음과 확신으로 힘든 것을 이겨내고 있다

▶ 경천애인으로 봉사에 임하다.
그는 자신의 사업체들을 “하나님의 은총이 없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의 역사로 표현한다. 그렇게 확신에 차있는 강한 신념은 꿈도 크게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는 “사업이 잘 돼서 성공하면 사회복지센터(어린이복지센터, 어르신복지센터, 장애인복지센터 등)를 건립하는 것이 나의 꿈” 이라고 하며 “지금도 꿈을 실현하기 위해 관심을 많이 갖고 현실적인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고 말한다.
이러한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군포시장애인단체연합회 후원회 이사, 수리청소년문학대전 추진위원, 수리청소년UCC대회 추진위원, 수리리틀야구대회 추진위원회, 군포시 예술단 운영위원 등을 맡아 지역봉사에 임하고 있다. 특히 어르신 모심과 청소년에게는 자식과 부모처럼 섬기기에 그의 주위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가 지역에서 조용히 봉사에 임하고 있는 것은 경천애인사상이 기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회사와 사회에서 모범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내 덕이라고 한다. 그의 부인은 박 대표가 하고자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동반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신앙에 근거하여 생활하고 있는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역시 하나님과 이상돈 목사님이라고 한다. 그는 “내가 그동안 살아온 삶은 모두 신앙생활과 연계되어 있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나의 부모님만큼 존경 한다”고 말한다. 또한 올바른 사역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이상돈 목사님에 대해 감사함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도 ‘positive mind’는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하나의 열쇠이자 키워드라고 말한다. 그리고 “‘positive mind’를 가지지 못하면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게 되며 결국 자신도 모르게 부정적인 삶이 지속되고 자신에 대한 믿음이 추락해 나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이르며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를 자신의 인생성공의 열쇠로 삼아 이 열쇠를 이용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경험을 꿰뚫고 넓은 경험과 경륜을 이어가라”라고 조언한다.
사실 그는 인터뷰 내내 모두 하나님 덕분에 자신의 모든 인생이 잘 풀렸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자신의 행동, 자신의 말을 스스로 믿고 그 믿음을 통해 용기를 얻은 것이기에 순탄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건강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위해 항상 범사에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또 다른 박수균 대표이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약력

전북 익산출생
남성고 졸업
전북대학교 전자공학 졸업
한국산업기술대학원 신소재공학 졸업
공군 학사 장교 복무
㈜대우 반도체 사업부 근무
미국 SILVACO사 근무
대한예수교 장로회 영광교회 장로
군포시장애인단체연합회 후원회 이사
수리청소년문학대전 추진위원
수리청소년UCC대회 추진위원
수리리틀야구대회 추진위원
군포시 예술단 운영위원
주식회사 쎄미존 대표 이사
주식회사 골드테크놀로지 이사
주식회사 에프엠에스 이사

송용순 기자 sys5594@hanmail.net
“경기헤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