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기사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1544909&code=61221111&sid1=chr&cp=nv2


18가지로 정리된 어록은 이렇습니다. 

1. 공부하기 힘들고 싫지? 너는 시집이나 가라!! 대학원 졸업하면 결혼 대상자만 줄어든다.

2. 큰 목사 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괜찮은 사람이나 돼라! 

3. 만 명!! 만 명!! 큰 교회는 그만두고 너의 어머니와 너의 색시 두 명만이라도 은혜 받고 회개할 수 있는 설교를 해라! 

4. 목사 내쫓는데 앞장서지마라!! 이건 임명권자에 대한 기본권 침해이다. 매일매일 탄원서를 제출하면 그 분이 정확히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5. '너희들 대통령 만나봤어?' 야! 대통령을 만나려고 해도 최소한 1시간 전에 정자세로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 늦어? 말도 안되지… 

6. 5년만 예수 믿고 목사 노릇하다가 비참하게 끝날 사람은 컨닝해라… 지금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시험 쳐라!! 

7. 야!! 1, 2학년 이미 데이트는 끝냈어야지!! 공부 제일 많이 할 3학년에 데이트에 미쳐??

8. 자기에게 너무 큰 감투를 오래 쓰고 있다가는 그 감투가 눈을 덮어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못한다. 

9. 성경책은 가장~~ 가까운 곳에 펴 놓아라!! 덮어놓으면 펴는데 3년 걸린다.

10. 너희들 하루에 밥 3끼 먹지?? 하루에 성경책 석장은 읽어!!(영혼도 굶으면 죽는다)

11. 하나님은 거짓말도 못하고 사기도 못 친다. 이 점에서 참 능력이 탁월하지~~ 그러나 그분에게는 그런 인간을 다 알고 그 목숨을 취할 능력이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12. 야!! 어차피 배우자는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걸리는 거야. 정말 선택을 한다면 그런 걸 선택을 하겠냐?? 7년 연애해도 잘 몰라!! 하나님께 자신과 맞는 사람이 걸리게 해달라고 기도나 해라. 

13. (어느 사은회 때…) 졸업생 여러분!! 잘 가요~~ 잘 살아요~~ 그리고 잘~~ 죽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14. 야~~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런 짓은 안 한다!! 예수쟁이들은 상식도 없냐?? 야~~ 잘 믿는 척 하지말고 상식에 벗어나는 짓이나 하지마라. 

15. 땅의 일도 모르는 게 많은데, 하늘의 일을 다 안다고…?? 건방떨지마~~!

16. 세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죄인들이 살고, 교회는 드러난 죄인들이 모여 있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법이야!! 

17. 온 천하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냐?? 목숨!!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뭔지 알아?? 사명이야~~ 사명~~!!! 그러나 그 사명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주의 일 한답시고 하나님의 영광 가로 채면 넌 죽어!!!(마 16장, 행 20장, 고전 10장을 읽어봐.) 

18. 야~!! 교회다니면서 복 받을 생각만 하지 말어!!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야~~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가는 거야~~!! 

국민일보

“일본에 아첨하던 친일파가 독립 이후 한국에서 권력을 쥔 것은 정치세계만이 아닙니다.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친일 목사들이 해방 후 한국교계에 지도자로 나섰다는 겁니다. 형무소에서 고생하신 출옥성도들은 모두 제외되고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조차 없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조수옥(1914∼2002·인애복지재단 설립자)이 1998년 무렵 한 일본인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1938년 10월 어느날 경남 사천군 삼천포읍(현 사천시) 삼천포교회 전도사 조수옥은 사천경찰서 유도관으로 끌려갔다. 관내 장로회, 성결교, 안식일교, 재림교 등 기독교관련 모든 목회자 등과 함께였다. 경찰서장이 말했다.


“당신들은 오늘 당장 신사참배를 하러 가야 한다. 참배 거부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다.”

한 달 전 그가 속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 여파가 남해의 한 소읍에까지 미친 것이다.

“저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해선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마음으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참배를 하더라도 지장이 없다는 총회의 이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런데 그날 모두가 신사참배에 동참했습니다. 제게 신앙을 지도하던 목사도, 연륜 많은 장로도 모두 참배했습니다. ‘난 가지 않는다’고 되새기면서 교회로 돌아왔어요. 체포를 각오하고 있었죠.” 

그해 교계지도자 윤치호(1865∼1945·당시 연희전문 및 이화여전 이사)의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오전 8시 조선신궁에 갔다. 흥업구락부 모든 회원 20여명이 참배했다. 종로경찰서 관내 있는 기독교 가정들은 놋쇠로 된 물건을 하나씩 거두어 조선군사령부에 제출했다. 620종이 서울YMCA에 답지해 경찰서로 넘겨졌다. 경찰은 굉장히 기뻐했다.’(38년 9월 13일)  

‘…감리교 총회가 속개됐다. 오후 1시30분 배재중 운동장에는 기독교 학교 전교생과 서울의 감리교 신도들이 모였다. 예배를 마친 후 양주삼 박사가 앞장선 채 7000명이 넘는 인원이 총독부 청사까지 행진해 천황과 총독 만세를 불렀다.…3시쯤 조선신궁을 참배했다.’(38년 10월 7일) 

조수옥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크리스천 여성으로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오직 말씀만 붙잡고 세파를 이겨낸 반듯한 그의 삶에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해방 후 친일 목사들이 돌변하여 교계지도자로 나서고, 그런 죄악의 뿌리가 기독교 혐오로 나타난 지금의 현실에선 더욱 그러하다.

‘신사참배’한 교계 지도자들의 민낯 

스물넷의 여자 전도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본 경찰의 공포에서 해방된 승리자로 죽고 싶어서 기도를 했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가녀린 어린양. 삼천포교회로 돌아온 조수옥은 그 공포를 이기고자 삼천포읍 북쪽 와룡산에 올라 칠흑 같은 공포와 싸우며 자신을 하나님께 던졌다. 경찰에 잡혀 죽느니 산에서 기도하다 죽는 게 낫다 생각해서였다. 80대 할머니, 40대 여집사와 함께였다.

조수옥은 깊은 밤 ‘주여 주여’를 부르짖었으나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조수옥은 두 사람과 떨어져 홀로 바위 위에 앉아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기도했다. 하지만 울음만 나왔다. 

“그런데 ‘두려워 말라’(사43:1)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이 제게 주어졌다는 거죠. ‘하나님, 저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상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아침이 됐어요.” 

다음날 경찰서장 방으로 잡혀갔다.  

“너는 왜 신사에 가지 않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갈 수 없습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정당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 나의 관할구역에서 떠나라!”

추방은 당시 일경이 위신을 세우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관내 신사참배 100%라는 보고서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조수옥은 삼천포를 떠나 신사참배 거부투쟁의 거점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했다. 교인은 500여명이었으나 목사 없이 장로 중심으로 유지됐다. 이약신 목사가 참배 거부로 경찰 압력에 못 이겨 사임했기 때문이다. 눈코 뜰 새 없이 예배를 인도하며 충성했다.  

그리고 조수옥은 39년 4월 경남 진주의 진주성경학교에 다니러 갔다가 체포돼 경찰에 다시 연행됐다. 그가 졸업한 이 신학교는 참배거부로 폐쇄됐던 것이다. 그는 북부산경찰서로 이송됐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일본 신들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천황은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조수옥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이 년을 죽여”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일단 석방됐다. 한상동(1901∼1976) 이인제 주남선 최상림 목사 등 부산·경남 목회자와 교인의 반발을 우려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대개의 예배당에는 신주와 히노마루(일장기)가 걸려 있었고 천황을 찬양하는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 예배도 동방요배를 하고나서 드렸다.  

그 해 여름 조수옥은 한상동 한정교 윤술용 이인제 목사 등과 부산 수영해수욕장에서 비밀집회를 갖고 거부투쟁을 전개했다. 한 목사가 지도자였다. “영전(靈戰)에 임해 죽기까지 싸워 순교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40년 5월부터 대대적 검거가 시작됐고 조수옥은 9월 20일 체포됐다. 이듬해 7월에 평양형무소로 이감됐다.

“추위보다 수치가 견디기 힘들었다” 

지난주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팔용로 마산동교회(전호성 목사) 예배당. 전 목사와 권오태 장로, 조성철(66) 인애복지재단 이사장 등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새 정부에 대한 기도도 있었다. 마산동교회는 재단 설립자 조수옥의 선교정신을 받든 교회다. 교회는 재단이 운영하는 강당을 활용하고 있다. 재단 모태인 마산인애원(현 마산인애의집)은 경남 사회복지의 산역사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기도 응답 없이 출옥한 뒤 어찌 고아들을 챙길 수 있었겠습니까. 6·25전쟁 직후도 아닌 1945년 11월에 고아원 마산인애원을 시작했습니다. 형무소에서 쇠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시고요.” 

조 이사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마산 장군동사거리 당시 인애원 앞에 버려진 전사 국군의 아들이었다.

이날 오후 조 이사장, 오진웅(47) 재단 국장 등과 함께 장군동사거리 옛 인애원 터를 찾았다. ‘장군동다리’로도 불리는 사거리는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시청 등 기관과 명문 중고교가 있던 번화한 도심이었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고아원 문을 못 들어가 뱅뱅 돌았어. 남들 눈을 피해 쏜살 같이 들어가야 했지. 고아원 아이라는 게 창피했거든. 나중에 어머니가 우리들 사정을 아시고 ‘마산인애원’ 간판을 떼 버리셨지. ‘너희들 집인데 당당하게 들어가라’면서 말이야.” 

조 이사장이 이제는 음식점으로 바뀐 ‘옛집’ 대문 자리를 보면서 오 국장에게 이같이 말했다.

“늘 정갈하고 그러면서도 대담하셨어. 전쟁 직후라 먹을 게 항상 부족했어. 우리들 100∼200명 먹일게 없을 땐 ‘자 애들아 말씀으로 배부르자’고 하며 달래셨지. 그땐 무슨 얘기인지 몰랐어. 그래서 가출도 두어 번 하고. 허허. 불효자지.” 

다시 일제강점기. 조수옥의 감옥생활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마룻바닥에 배설물이 그대로 있었고, 구더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왔어요. 꽁보리밥 한 주먹이 주어지는데 구더기와 생김새가 같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변기통 안에 사는 것과 같았죠. 평양형무소로 한상동 최상림 주남고 목사, 이현숙 장로 등과 함께 이송됐어요. 그곳 감방은 벼룩과 빈대로 견디기 힘들었죠. 무엇보다 10월∼5월까지 계속되는 추위가 말도 못했죠. 담요가 얼어 아침이면 두꺼운 나무판자처럼 딱딱했죠. 최 목사님은 고문과 후유증으로 형무소에서 돌아가셨어요.” 

조수옥은 형무소에서 네 가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아를 돌봐야 한다. 돈은 모든 악의 뿌리다. 

6·25 전쟁 전에 설립된 인애원 

조 이사장이 인애원 개원 배경을 말했다. “감옥에 들어온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고아였답니다. 부모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죠. 어머니는 누군가 대신해서 그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지극히 성경적 실천을 확실히 깨달으신 거죠. 저는 어머니의 수난 가운데 너무 마음이 아픈 대목이 있어요. ‘아프고 추운 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게 수치였다’. 여성인권이 어디 있었겠어요. 봉두난발한 자기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드셨겠지요.”

조수옥의 항일은 평양지방법원 공판기록이 말해준다. 이 기록을 들여다보면 신사참배 거부가 명백한 독립운동임을 절감한다. 그런데 국가는 종교신념쯤으로 보고 독립운동 인정 요구를 회피한다. 정작 편들어야 할 교계는 출옥 성도의 사료 확보와 섬김에 소극적이다.  

조수옥은 약한 자였다. 하나님의 의(義) 앞에서는 강한 자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이 그랬듯,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 출옥성도들도 친일파에게 당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교계지도자의 박해를 받은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국가와 사회단체는 조수옥에게 국민훈장동백장(1986년) 일가상(97) 용신봉사상(97) 유관순상(2002)을 수여했다. 정작 교계는 역사적 평가 작업을 소홀히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조수옥과 신사참배 거부 출옥성도는 어떤 의미인가. 부끄러워 불편함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닐까. 

조 전도사 행적 알려지기까지 

1970년대 증언집 출판 계기로 일본 교계 대상 수십 차례 간증
 

조수옥은 생전 일본인 목사 와타나베 노부오에 의해 일본에 알려졌다. 

1974년 아시아칼빈학회 참석차 한국 방문을 했던 와타나베 목사가 조수옥 증언집을 일본에서 출판했던 것. 이를 계기로 조수옥은 일본 교계와 사회단체를 대상으로 수십 차례 간증을 했다. 우리 교계는 불편해 했다.

와타나베 목사는 게이토대학 철학과를 나와 도쿄고백교회 목사, 일본기독교신학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전쟁 책임을 지고’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 등이 있다.  

창원(마산)·사천·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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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가 대학총장이 된 사연

 

  어떤 처녀가 17세에 결혼해서 시집살이를 하다가 19세에 과부가 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보면 "에게게..꽃이 피다 말았네..!" 하면서 애석하게 여겼고 19살 과부는 너무도 창피하고 기구한 운명에 기가 막혀 하루는 거울 앞에 앉아 긴 머리카락을  사정없이 잘라내 버렸다. 젊은 과부가 마을 어르신들로 부터 "아직도 어린나인데 안됐다" 하면서 동정하는 말들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너무도 기구한 자신의 운명에  좌절하지 않았고,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지인의 소개로 어느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 집에서 열심히 일했고 인정도 받아 어느날 주인집 어르신께 두가지 요청을 했다. 하나는 "야간 학교에라도 가서 공부를 할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주일날이면 꼭 교회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이었다 집 주인은 젊은 과부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 주어 당시 이화여학교 야간부에 가서 공부를 했고 주일날에는 교회에도 보내 주었다. 그녀는 학교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더니 장학생이
되었고 나중에는 실력과 인품도 인정을 받아 학교에서 일본으로 유학을 보냈다 .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오게된 젊은 과부는 너무 기뻤고 감사해서 더욱 열심히 공부했고 노력을 해서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본국으로 건너와 당시 조선총독부 장학사로 일하다가 해방과 함께 학교를 세우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숙명여자대학 초대학장이 된 임숙재(任淑宰,1891~1961) 선생님이다

그분은 숙명여대를 성장시켰을 뿐 아니라 불굴의 의지로 운명을 바꾸어 놓은 위대한 사람이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성공하기를 원하십니까? 환경을 다스리십시오" 라고 늘 가르쳤고 19세 과부가 식모살이에서 대학 총장까지 된 사연은 인간이란 존재는 "고난을 잘 이겨내야 무슨 일에서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는 것이다.
( 마가복음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 할 일이 없느니라 )

 

                                                        ---   군포시청기독교선교회  ---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믿음의기업,사람들 2016. 3. 20. 07:18 Posted by allinda
목차
차례
1. 그 청년 바보의사
2. 홀로 남은 의사
3. 아주 특별한 처방전
4. 보이 소프라노였던 소년
5. 외로운 양치기
6. 그분을 위한 노래
7.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8. 그리고 어찌하여
9. 흔적들
 
그 청년 바보의사 추모동영상

출판사 서평
로 살다가 33세에
생을 마감한 한 청년의사의 삶과 사랑에 관한 기록

왜 사람들은 를 그리워할까요?

죽음 이후에 자신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젊은 의사는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다다르지 못한 성취를 이룬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책을 내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그의 동료 선후배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기꺼이 추천사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은 저까지,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고 있으니까요.
_시골의사 박경철의 추천사 중에서

이 책은 더없이 건실한 한 청년 의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우리 곁을 떠나면서 남긴 자신과 이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군 생활마저 군의관이라기보다는 일반 사병들과 같은 입장에서 함께 하다가 유행성출혈열로 인해 33세의 젊은 나이에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청년의 죽음이 이토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까닭은 청년의 죽음 뒤에 숨겨진 드라마틱한 배경 때문입니다. 신이 있다면 이토록 착한 사람을 데려갈 수 있는지, 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청년의 믿음은 신실했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 대한 기준과 의료 활동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랑하고 실천했습니다.


는 이 시대가 꿈꾸고 소망하는 의사의 모습

안수현 대위를 추억하며 예수님께서 군의관의 옷을 입으시고 한국 땅에 나타나셨다가 가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안 대위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_김록권(전 국군의무사령관 중장) 추천사 중에서

환자에게 성실하게 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의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청년 의사는 환자의 살이 베일 때 정말 자신의 살이 베인 것처럼 아파했습니다. 그 만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내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술을 펼쳤기에 여느 의사들과 달랐습니다. 몸의 병만 치료하는 게 아니라 환자들의 마음까지 깊이 헤아릴 줄 아는, 그야말로 '참 의사'였습니다. 환자의 손을 붙잡고 울어주고, 돈이 없는 환자를 위해 병원비를 대신 지불하며, 인연을 맺은 환자를 끝까지 살폈습니다. 의약분업사태 때는 서열이 엄격한 의사사회에서 받을 불이익을 감수하며 병원을 지켰습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왔던 예수의 모습 그대로, 가난하고 몸이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그저 예수님의 흔적을 쫓아 사는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가 남긴 삶과 사랑에 관한 유작

그가 하나님 품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놀라움과 아까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책의 발간으로 그의 삶에 나타난 작은 예수의 모습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_김영애(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사모, 의 저자)

그의 낮은 데로 임하는 삶은 군대라고 해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대에서도 의사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젊은 나이에 떠난 안타까움과 한결같은 그의 삶이 있기에 우리는 모두 그를 기억하려고 이 책을 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의 유작입니다.
바로 이 청년의 모습은 이 시대가 꿈꾸고 소망하는 의사의 모습이자 예수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시대에 이런 의사가 있었다니!'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나누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하는 생각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청년의 죽음은 아프지만, 독자들은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가슴이 훈훈해지는 느낌 또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남긴 글에서 그의 삶이 그의 글과 얼마나 일치하는지를 우리는 확인하면서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국판 테레사’ 서서평을 기억하시나요
기사입력 2012.03.14 오후 9:06
[한겨레]

내한 100돌 맞아 평전 2권 출간

1912년 조선 선교사로 파견

전라·제주 나환우·걸인 돌봐

고아들과 한집에서 살다가

주검마저 기증하고 하늘로

성녀 테레사 수녀(1910~97)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회에 입회한데 이어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돼 버려진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돌봤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인’이 아니다. 하지만 인도의 권위지가 인도인 5만명을 대상으로, 간디를 제외하고 ‘역대 위대한 인도인이 누구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꼽혔다.

엘리제 셰핑(1880~1934·왼쪽 사진)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해 테레사 수녀보다 18년 앞선 1912년 3월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다.

그는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업적들만으로 그를 제대로 알긴 어렵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 광주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엘리제 셰핑도, 그의 한국명 서서평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내한 100돌을 맞아 그를 기리는 두권의 평전이 동시에 출간됐다. 양창삼(전 한양대 경영대학원장)·양국조(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의장) 형제가 각각 과 를 펴냈다.

또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오는 17일 오후 2시 광주시 백서로 기독간호대 오원기념각에서 기념예배가 열린다. 예배 뒤엔 두권의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식이 이어진다. 평전엔 저자들이 사장될 뻔한 옛 선교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되찾은 사실감 있는 자료와 사진들이 가득하다. 양국조 부회장이 지난 2년 동안 모은 12만여점은 한국 개신교 역사를 정리하는 데도 긴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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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전남은 1930년 45만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명, 걸인이 1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버려진 어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또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다.

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산 서서평 같은 선교사 없었지요”

평전 쓴 양국조씨

이번에 서서평 평전을 쓴 재미동포 양국조(63·사진)씨는 서서평이 설립한 이일학교를 나온 어머니에게서 어려서부터 서서평의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의장으로 한인 선교대회를 주관하고 선교사들을 만나러 전세계를 누비는 그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인 한국 선교사들의 모델을 외국에서 찾지 말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을 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대부분 미국식 삶을 고수했고, 조선인과 같이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자며 사는 서서평 같은 인물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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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더우드(1859~1916·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는 서울 남대문 인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들 가운데 호화로운 3층 건물을 짓고 살며 동대문 부근에 별장까지 갖고 있었다. 유진벨(1868~1925·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교, 제중병원 설립자)은 승마를 위한 말 네필을 가지고 있었고, 의사선교사인 윌슨(1908∼1926·광주기독병원 2대원장)은 사냥을 즐겨 한꺼번에 사슴 24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지리산 아래서 조선인들에게 등짐을 지워 물품들을 남시루봉 정상부근에 지은 별장까지 나르게 하고, 그곳에서 포크댄스를 추었으니 당시 굶주리는 조선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승동교회 설립자인 무어 선교사는 백정의 아들을 의사로 키워내는 인간 평등을 보였지만, 절간에 가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불상을 산산조각냈다”며 “이런 것이 요즘 절땅밟기의 원조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서평의 별세 당시 사설을 보여주며 당시 선교사들과 서서평의 삶을 비교해 들려준다. 사설은 “백만장자의 위치에 지지 않을 집에 편히 앉아서 남녀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 양(서서평)의 일생은 어떠한 음성을 가지고 울리울까?”라고 썼다.

그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스킨십을 하기 위한 것”이라며 요즘 외국으로 파송된 2만여명의 한인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제3세계에 가서도 자녀교육 등을 위해 주요 도시에 머물며 정작 필요한 곳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역사나 삶은 제쳐 둔 채 윌리엄 텔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일지를 공부하는데,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야말로 우리가 제3세계에서 어떻게 선교해야 할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8월에 이란 가이드북을 펴낼 예정이다.

조현 기자

유명 패션브랜드 포에버 21(Forever 21) 장도원 회장이 최근 KWMC에 초청돼 간증을 전해 참석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미국 내 부자 88위, 지난해 7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커플’ 38위의 타이틀이 어색할만큼 장 회장은 겸손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장 회장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장사를 잘하냐? 묻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 잘 믿는 것 밖에 없다”면서 “예수 안에서 거듭나고 브라질, 중국 조선족 선교를 다녀오면서 삶이 바뀌었다”고 간증했다.

“당시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는 “선교를 다녀와 이전에 사랑했던 것을 다 버렸다. 가장 사랑했던 것이 뭐였는가 봤더니 돈이었다. 그래서 돈을 버리기 시작했고, 그 다음부터는 내 수입의 십분의 일로 살았다. 아이들에게 사고 싶은 거 안사주고 냉장고도 텅텅 비었다.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고 했다.

장대표는 몇 해 전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 과천시에 5천억을 투자해 복합쇼핑몰을 만들려했다. 여인국 과천시장이 애를 썼지만 이를 특혜라고 몰아 붙이는 이들 때문에 무산된 바 있다.

http://www.christiandaily.co.kr/news/kwmc--%EC%84%A0%EA%B5%90%EC%82%AC--%EC%84%A0%EA%B5%90%EC%82%AC%EB%8C%80%ED%9A%8C--%ED%95%9C%EC%9D%B8%EC%84%B8%EA%B3%84%EC%84%A0%EA%B5%90%EB%8C%80%ED%9A%8C--%EC%84%A0%EA%B5%90--%EC%A7%91%ED%9A%8C--%EC%B0%AC%EC%96%91--%EA%B8%B0%EB%8F%84--%EC%84%A0%EA%B5%90%EC%A0%84%EB%9E%B5--%EC%8B%9C%EC%B9%B4%EA%B3%A0--%ED%9C%AB%ED%8A%BC%EB%8C%80%ED%95%99--%EA%B3%A0%EC%84%9D%ED%9D%AC--%ED%95%9C%EA%B5%AD%EA%B8%B0%EB%8F%85%EA%B5%90--%EA%B8%B0%EB%8F%85%EA%B5%90--%EC%9E%A5%EB%8F%84%EC%9B%90--Forever21--Forever--%EA%B0%84%EC%A6%9D--%ED%9A%8C%EC%9E%A5--%ED%8C%A8%EC%85%98-8723.html

 


성탄절을 회고하면 평촌교회 림형식 목사는 생일잔치가 생각난다.
목회를 하신 아버지는 가족의 생일상을 못차리게 하고 성탄절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를 생일로 지내게 하셨다. '예수님 생일상이면 됐다'는 주장이셨지만 가난한 교구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뜻이 있으셨다.
그래도 원 생일에 목사를 찾는 사람들을 피해 아버지는 생신날 일부러 집회에 나가시곤 했다.
故 최수복 권사를 그리며… 림인식·림형석 父子목사의 못다한 사부곡&사모곡미수(米壽)의 늙은 목사는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가 그립다. 회갑(回甲)을 맞은 그의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한국 최초의 4대 목회자 집안의 며느리와 사모로, 어머니로 살다가 지난달 초 소천한 고(故) 최수복 권사의 남편 림인식(88·노량진교회 원로) 목사와 장남 림형석(61·평촌교회 담임)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부자(父子) 목사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아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나의 아내여 나의 천사여…”#림인식 목사의 사부곡(思婦曲) 림인식 목사를 만난 건 지난 7일 오전 서울 흑석동 자택에서다. 거실 식탁 앞에 앉은 림 목사 뒤로 그의 5남매 자녀들의 가족사진이 좌우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시 127:3)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 한가운데 최 권사의 사진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장례식만 수백 번 집례하면서 여러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내 아내를 보내는 건 기분이 또 달라. 다르더라고….” 그는 휴지를 뽑아 붉어진 눈시울에 갖다 댔다. 아내에게 그는 어떤 남편이었는지 궁금했다. “평생 꽃다발 한 번 사들고 집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남편이었죠. 가정적으로는 낙제점일 거예요.” 림 목사는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20년 동안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던 얘기부터 꺼냈다. “목회 초기 때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목사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책 살 돈이 많이 부족하니까 좀 이해해 달라’고….” 그는 교회로부터 월 사례비를 받는 날이면 지게에 책 꾸러미를 가득 싣고 집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림 목사 부부가 63년 동안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 덕분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요. 서로의 성장 배경만 봐도 아내는 부잣집 딸이고, 나는 가난한 목사 아들이었죠. 나는 동적이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런 걸 싫어했고요. 체질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서로 달랐어요.” 서로 같은 점이라곤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고 했다. “목회였어요. 아내는 목회자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나를 만났어요. 그리고 나의 목회를 위한 일이라면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서로 다른 부분이 100가지가 넘어도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우리 부부를 꽁꽁 묶어 준 셈이지요.” 최 권사는 남편 설교에 대해서도 “당신 설교 너무 길어요. 설교내용이 너무 어려워요”라며 달고 쓴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장례식 예배에서 그는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천사였소”라고 고백했다. 림 목사는 그러나 아내에 대한 빚진 마음이 여전한 듯했다. “목회일변도의 제 삶 때문에 아내가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요. 남편이 알지 못하는 고민도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내를 위해 해준 일도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림 목사는 6∼7년 가까운 아내의 투병기간 동안 병시중을 도맡았다. 생전의 최 권사는 당뇨병과 파킨슨병, 신장병 등 많은 질환을 앓았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20년 동안 생활비 안 줬던 것도 그때 다 용서해줬을 거예요(웃음).” 림 목사 어깨 너머의 사진 속 아내 모습에서도 엷은 미소가 비쳤다. “어머니 목소리가 그립습니다”#림형석 목사의 사모곡(思母曲) 아들이 생각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는 가정예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일 경기도 안양의 평촌교회 집무실에서 만난 림형석 목사는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형석이는 대(代)를 이어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 달라’던 어머니의 기도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교회 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가정예배는 저녁에 어머니가 인도하실 때가 많았어요. 동생들과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던 습관이 우리 가족 모두의 삶 가운데 깊이 각인된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의 기도대로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목회를 안 했다면 오히려 더 막막했을 겁니다.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던 기도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5명의 자녀를 두셨으면서도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셨어요. 가래떡 하나를 먹을 때도 5등분으로 나눠 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어머니는 나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믿음이 확고했어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역만리 자식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민 목회 시절이었어요. 개척한 교회가 성장하고 제법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중 20년 만에 덜컥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죠. 어머니가 ‘우리 가까이서 지내자’고 말씀하시는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림형석 목사는 3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목회를 했다. 담임을 맡았던 미국 LA의 선한목자장로교회는 60여명이던 성도가 700여명까지 증가하는 등 큰 부흥을 이뤘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이 그립다고 했다. “20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요. 위로가 되고, 힘도 나고….” 그의 넋두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풍수지탄(風樹之嘆)의 마음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http://www.ccnanum.org/bbs/board.php?bo_table=tb12≀_id=3398
2013.5.30일, 동아일보 2면 톱기사에 ‘모나미 볼펜 출시 50주년’에 대한 기사가 났다.
모나미 볼펜은 1963년 5월 1일에 출시되었다. 지금까지 50년 동안 36억 자루가 팔렸다. 그걸 길게 늘여 놓으면 지구 열두 바퀴를 돈다고 한다.
모나미 볼펜의 송상석 사장이 장로다. 회사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했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아이디어를 얻고 기술을 배워서 1년 만에 모나미 볼펜을 시작했는데 왜 모나미 볼펜의 상호가 153인지 동아일보에 기사가 났다. 요한복음 21장 11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가 백오십삼마리 잡혔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더라” 가득 채웠는데도 찢어지지 않았다. 153이라는 로고의 숫자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송 장로 가정은 주일마다 자녀들이 모두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로 나온다고 한다.
송장로는 기도에서 1.믿음의 자녀로 나서 주일성수 않은 것 2.십일조 않은 것 3.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고 요한복음 22:11을 찾았다.
송장로는 세계 모든 사람들 손에 153볼펜이 들려지기를 기도했다. 당시 세계 인구 50억 자루가 팔리기를 기도했고 이 기도는 응답되었다.

ㆍ인생 순례길 ‘지혜의 지도’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어머님의 무릎에 앉아서, 재미있게 듣던 말 그때 일을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 말, 이 책 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성경을 떠올리면 이 오래된 찬송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나도 가사처럼 성경과 처음 만났다. 어떤 이는 BIBLE(성경)의 앞글자를 가지고 ‘Basic Information Before Leaving Earth’라는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이 땅에 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내게 성경이 그랬다.

도지사에 취임한 후 나는 선언했다. 공식 일과가 시작되는 9시 이전에는 회의를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이른 아침 나만의 시간을 갖지 않은 채, 일정에 맞춰 살다 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나 성경 한 구절을 묵상하는 것으로 시작한 하루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날이 된다.

성경 중에서도 특히 시편과 잠언은 내게 인생을 가르쳐 준 스승이다. 물맷돌 다섯 개로 적의 장수와 맞붙은 소년 다윗의 인생은 대하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다윗의 마음이 되어 시편에서 위안을 얻는다. 도지사가 된 후에는 솔로몬의 지혜서인 잠언을 자주 읽게 되었다.

왕에게 쫓기며 기나긴 광야생활을 하다가 왕이 되었던 다윗, 떨리는 무릎을 딛고 일어난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리더들의 이야기, 절망에서 인생을 개척해 내는 야곱과 요셉, 지혜의 왕 솔로몬 등 성경 속 수많은 인물들은 오늘을 사는 내게 나침반과도 같다.

성경은 내게 ‘앎’에서 머무르지 않고 ‘삶’을 살아 나가라고 말한다. 인생이라는 기나긴 순례길에 ‘성경’이라는 지도를 하나 품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512032227465

김용만, 아프리카 오지마을에 태양열 랜턴 보내기! 뮤지컬 ‘방향’ 노개런티 참여…스타인헤븐

국민일보 2015.11.20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0084510&code=61221111&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