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테레사’ 서서평을 기억하시나요
기사입력 2012.03.14 오후 9:06
[한겨레]

내한 100돌 맞아 평전 2권 출간

1912년 조선 선교사로 파견

전라·제주 나환우·걸인 돌봐

고아들과 한집에서 살다가

주검마저 기증하고 하늘로

성녀 테레사 수녀(1910~97)는 동유럽의 세르비아에서 태어나 18살에 수녀회에 입회한데 이어 1930년 인도의 빈민가로 파견돼 버려진 채 죽어가던 사람들을 돌봤다. 테레사 수녀는 ‘인도인’이 아니다. 하지만 인도의 권위지가 인도인 5만명을 대상으로, 간디를 제외하고 ‘역대 위대한 인도인이 누구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인’으로 꼽혔다.

엘리제 셰핑(1880~1934·왼쪽 사진)은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지내던 중 개신교에 투신해 테레사 수녀보다 18년 앞선 1912년 3월 조선 선교사로 파견됐다.

그는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와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와 조선여성절제회, 조선간호부회(대한간호협회 전신), 여전도회연합회 등을 창설해 이 땅의 여성운동과 간호계, 개신교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런 업적들만으로 그를 제대로 알긴 어렵다.

그는 전라도 일대의 나환우들과 걸인들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집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병들어 생을 마쳤고, 자신의 주검마저 송두리째 병원에 기증하고 떠났다. 광주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장으로 거행된 그의 장례식엔 수많은 나환우와 걸인들이 상여를 메고 뒤따르면서 “어머니!”라 부르며 애도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엘리제 셰핑도, 그의 한국명 서서평도 기억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의 내한 100돌을 맞아 그를 기리는 두권의 평전이 동시에 출간됐다. 양창삼(전 한양대 경영대학원장)·양국조(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의장) 형제가 각각 과 를 펴냈다.

또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오는 17일 오후 2시 광주시 백서로 기독간호대 오원기념각에서 기념예배가 열린다. 예배 뒤엔 두권의 서서평 평전 출판 기념식이 이어진다. 평전엔 저자들이 사장될 뻔한 옛 선교사들의 자료를 발굴해 되찾은 사실감 있는 자료와 사진들이 가득하다. 양국조 부회장이 지난 2년 동안 모은 12만여점은 한국 개신교 역사를 정리하는 데도 긴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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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전남은 1930년 45만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만명, 걸인이 11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서평은 1년 가운데 100일 정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며 병자들을 돌보고 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달간 500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쫓겨나거나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서서평은 당시 이름조차 없이 ‘큰년이’, ‘작은년이’, ‘개똥 어멈’ 등으로 불리던 조선 여성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 불러주고, 자존감을 살리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명의 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일깨웠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아이 14명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가 버려진 어이들을 돌보다 숨져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또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다.

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맡에 걸려 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전문 휴심정(well.hani.co.kr)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산 서서평 같은 선교사 없었지요”

평전 쓴 양국조씨

이번에 서서평 평전을 쓴 재미동포 양국조(63·사진)씨는 서서평이 설립한 이일학교를 나온 어머니에게서 어려서부터 서서평의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한인세계선교협의회 부의장으로 한인 선교대회를 주관하고 선교사들을 만나러 전세계를 누비는 그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인 한국 선교사들의 모델을 외국에서 찾지 말라고 말한다.

“미국에서 온 초기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과 고아원을 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지요. 그러나 대부분 미국식 삶을 고수했고, 조선인과 같이 된장국 먹고 고무신 신고 함께 자며 사는 서서평 같은 인물은 없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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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언더우드(1859~1916·새문안교회와 기독교서회,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설립자)는 서울 남대문 인근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들 가운데 호화로운 3층 건물을 짓고 살며 동대문 부근에 별장까지 갖고 있었다. 유진벨(1868~1925·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교, 제중병원 설립자)은 승마를 위한 말 네필을 가지고 있었고, 의사선교사인 윌슨(1908∼1926·광주기독병원 2대원장)은 사냥을 즐겨 한꺼번에 사슴 24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지리산 아래서 조선인들에게 등짐을 지워 물품들을 남시루봉 정상부근에 지은 별장까지 나르게 하고, 그곳에서 포크댄스를 추었으니 당시 굶주리는 조선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승동교회 설립자인 무어 선교사는 백정의 아들을 의사로 키워내는 인간 평등을 보였지만, 절간에 가서 들고 있던 지팡이로 불상을 산산조각냈다”며 “이런 것이 요즘 절땅밟기의 원조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서평의 별세 당시 사설을 보여주며 당시 선교사들과 서서평의 삶을 비교해 들려준다. 사설은 “백만장자의 위치에 지지 않을 집에 편히 앉아서 남녀 하인을 두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어떤 선교사들의 귀에 양(서서평)의 일생은 어떠한 음성을 가지고 울리울까?”라고 썼다.

그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가 되고 스킨십을 하기 위한 것”이라며 요즘 외국으로 파송된 2만여명의 한인 선교사 가운데 상당수가 제3세계에 가서도 자녀교육 등을 위해 주요 도시에 머물며 정작 필요한 곳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한국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의 역사나 삶은 제쳐 둔 채 윌리엄 텔이나 허드슨 테일러 같은 외국 선교사들의 선교일지를 공부하는데,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야말로 우리가 제3세계에서 어떻게 선교해야 할지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8월에 이란 가이드북을 펴낼 예정이다.

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