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조찬기도회는 3월 기도회를 26일 평촌 새중앙교회에서 드렸다.

이구연 안양교회 담임목사는 시편57편1~11 말씀으로 [정답이 아니라 해답으로 사는 삶] 제목의 설교를 했다.

지역의 성시화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위하여 2011년 창립한 안양지역조찬기도회는 4월 23일 오전7시 4월 기도회를 새중앙교회에서 드린다.

 

 

수도권 최대 규모 더존의료재단 경희재활요양병원과 시흥시기독교총연합회가 8월 4일 병원 2층 힐링 라운지에서 의료지원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이날 체결식에는 경희재활요양병원 이금자 이사장을 비롯한 시흥시기독교총연합회(이하 시기총) 지광식 총회장(성천감리교회) 등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하였다.

경희재활요양병원 조윤주 전략기획부장의 병원소개에 이어 이금자 이사장과 지광식 총회장의 인사말과 함께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인공신장실, 고주파온열치료실, 힐링센터(황토 · 참숯 · 편백 찜질방, 원적외선실, 건습식 족욕기, 반신욕기, 안마의자, 암환자 전용 셀프운동 공간), 암 완화 및 호스피스 병동 등 병원 주요 시설물을 순회하였다.

시흥시기독교총연합회(총회장 지광식 목사)는 시흥시의 550여개의 교회를 대표하는 기독교 연합단체다.

1987년 연합활동을 시작한 시기총은 초대회장 박기홍 목사(신천감리교회)를 시작으로 올해 제37대 총회장 지광식 목사(성천감리교회)를 중심으로 동구(신천권, 지역회장 김정팔 목사) · 중구(연성권, 지역회장 윤화란 목사) · 서구(정왕권, 조상구 목사)를 지역적으로 편성하여 초교파적으로 연합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시기총은 시흥시 관내 교회연합은 물론이고 매월 시흥 지역 발전을 위한 기도회, 부활절 연합예배, 사랑의 쌀 모으기 운동 등 이웃사랑을 선도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또한 매년 회람집을 발간하여 유대관계를 지속할 뿐만 아니라 산하 생명사랑 법인, 시흥시 목회자 축구단 그리고 협력단체 호스피스 선교회와 월드비전, 기아대책위원회, 시흥경찰서 경목위원회, CBMC(한국기독실업인회) 등 기독교 NGO 단체와 함께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안산 경희재활요양병원은 전문의 15명, 8개의 진료과, 140여 명의 간호 인력이 함께하고 있으며 다양한 진료과와의 협진 등을 통해 환자 맞춤형 케어가 가능한 수도권 최대 규모(573병상) 요양병원이다. 

전문 재활, 암 통합, 인공신장(투석), 완화의료(호스피스)는 물론 양 · 한방 협진과 여성 크리닉 등을 운영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3주기 의료기관평가인증을, 7월에는 2주기 3차 적정성 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인 1등급을 획득한 바 있다.

또한 병원에 경희교회가 있어 목사(최병원)가 상주하면서 환자의 빠른 쾌유를 기원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환자에게는 간병료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경희재활요양병원 이금자 이사장은 “시흥시기독교총연합회와의 협약을 통해 어려운 처지의 소외계층에게 맞춤형 의료서비스를 제공해 공동선을 실천하겠다. 우리 병원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믿음이 있는 병원이며 언제나 환자에게 정성껏 가족처럼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시흥시기독교총연합회 총회장 지관식 목사는 “100세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아픔을 겪고 있는 성도들에게 신앙이 있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병원인 수도권 최대 규모 경희재활요양병원과의 협약을 체결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산시, 안산동산교회 대학부‘온누리마을’로부터 사랑의 성금 81만원 기탁받아

안산시(시장 윤화섭)는 안산동산교회 대학부 ‘온누리마을’로부터 사랑의 성금 81만원을 기탁 받았다.

안산시 상록구에 소재한 안산동산교회 대학부 온누리마을은 동화책 판매 프로젝트 ‘온책(溫·ON)’을 진행, 수익금으로 코로나19로 운영이 어려워진 관내 아동복지시설을 후원하는 나눔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이날 기탁 받은 후원금은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관내 아동복지시설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박한솔 온누리마을 간사는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상황이지만 따뜻한 동화책으로 마음을 밝히며 지역사회의 코로나19 극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시 관계자는 “지역사회를 위해 따뜻함을 나누어 주어 감사드리며, 도움이 필요한 아동복지시설에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과천시 보건소가 과천교회로부터 휴대용 선풍기 등 위문품을 전달받았다고 전했다.

과천교회는 코로나19 확산에 보건소 선별진료소와 예방접종센터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보건소를 직접 방문해 휴대용 선풍기 94개와 음료쿠키세트 124개를 위문품으로 전달했다.

이날 위로 방문은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과천교회 주현신 위임목사 등 최소한의 인원만이 참석했다.

주현신 위임목사는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한 여러분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작은 위문품을 준비해왔다. 무더위에 건강 챙기시길 바란다”라고 인사를 전했다.

김종천 과천시장은 “감염병 확산에 무더위까지 더해 힘든 시기지만, 직원들이 과천교회의 응원에 큰 힘을 얻었을 것이다. 감사하다. 시도 코로나19 확산방지를 위해 방역활동과 예방접종 진행에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목회 사역을 위한 자격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 2020. 7. 15. 11:43 Posted by allinda

목회 사역을 위한 자격
1. 목회자는 학식이 깊어야 합니다.
“목회자에게는 신학에 관한 철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다양한 신학 주제에 관해 깊고도 통찰력 있는 지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을 더욱 많이 연구해야 합니다”
2. 목회자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3. 목회자는 위엄이 있어야 합니다.
“가식을 피하고, 무례하거나 지치게 근엄해서는 안 되며, 천박하고도 성숙하지 못한 말과 행동을 피해야 합니다”
4. 목회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의, 그리고 그 분의 양떼를 탁월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5. 목회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물질, 심지어 생명까지도 기꺼이 희생하려는 자원함입니다”
6. 목회자는 반드시 성실해야 합니다.
7. 목회자는 모든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브라켈,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예배Ⅱ], p.194∼200

6월 29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 바오로 성인(Paul)=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는 당대의 유명한 유대인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회심할 때까지는 사울이라 불렀다. 천막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던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파였고,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박해자였다. 그는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34-36년 사이). 이 환시는 그의 극적인 개종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후 설교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는 즉각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그에 대한 위협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타(Aretas) 왕의 총독이 바오로를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밤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성벽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갔고, 3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났으며, 바르나바(Barnabas)의 지원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입적하였다.

그 후 그는 타르수스(Tarsus)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43년경에 바르나바에 의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으며 그곳 교회의 교사가 되었다.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대 전교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여행을 하게 된다.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키프로스(Cyprus),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를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베드로(Petrus)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가일층 진보된 단계를 맞게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2차 전교여행을 계획한다(49-52년).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갔고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리피(Philippi),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베레아(Berea)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Athenae)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 법정 진술만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로 귀향한 그는 다시 제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Corinthos)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에페수스(Ephesus)에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 사건이 유명하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개종을 설명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60-61년 사이에 몰타(Malta) 연안을 따라 로마(Roma)에 갇히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에페수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에우세비우스의 견해). 테르툴리아노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치명 하였다.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코린토스에서 57-58년); 코린토 1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코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티아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1, 2서(코린토스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티모테오서와 티토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 듯하다.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에 지낸다.

극적인 회심을 통해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해 복음 선포에 온 삶을 봉헌한 순교자다.

우리에게 ‘사도’로 익숙한 성인이지만, 사실 성인은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베냐민 지파의 유다인이자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성인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던 바리사이파였다.

사울이라고도 불리던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박해에 앞장섰고, 스테파노 성인을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성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성인은 부활한 예수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만남 이후 사울은 사흘 동안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마실 수도 없었는데 하나니아스를 만나 다시 볼 수 있게 됐고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예수와 성인의 만남이나 성인의 심경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만남을 통해 완전하게 회심한 성인은 박해를 위해 간 다마스쿠스에서 오히려 누구보다도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성인은 단순히 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고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선교여행을 떠났다. 3차례에 걸쳐 이뤄진 성인의 선교여행으로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레아, 에페소, 코린토 등지에서 선교했고 수많은 교회 공동체를 일궜다.

성인의 선교여행은 예루살렘 일대에 머물렀던 초기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성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성인은 박해로 투옥되기도 했는데, 자신이 선교한 모든 교회 공동체에 방문할 수 없는 어려움을 편지를 통해 해결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 27권 중 편지, 즉 서간은 21권이다. 그중 저자가 성인의 이름으로 저술된 성경은 무려 14권에 달한다.

성인의 편지, 즉 서간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공적인 선언을 다루고 있어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된 길로 들지 않도록 하는 성경이다.

성인은 스스로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선교했지만, 편지를 통해서도 선교를 했던 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성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서간들도 있지만, 성인의 권위로 쓰여 졌다는 점에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느낄 수 있다. 성인은 67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흥순 페이스북

서울 성균관대 입구에서 학교 정문을 향해 걷다가 정문 즈음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성대와 창경궁 담 사이의 길이 이어진다. 세모꼴 마을의 막다른 길이다. 길 끝은 성대 캠퍼스와 창경궁으로 막혔다. 그 막힌 지점에 절개지를 파고든 기형적 형태의 옛 우물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은 ‘왕의 우물’이라 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서울 새싹교회 지하에서 성경 원전 공부 지도(1989년).


그 우물 앞으로 평범한 2층 양옥이 자리한다. 예전 새싹장로교회다. 지금은 성대생을 주 입주자로 받는 원룸형 양옥이 됐다. 이 새싹교회는 2000년대 초반 시나브로 폐쇄됐다. 1950~80년대 한국 사회와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태선 문선명을 둘러싼 이단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신사훈(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박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곳이다.

신사훈 (1911~1998)


신사훈의 ‘나의 투쟁’은 외롭기 짝이 없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흉악한 이단 사냥꾼”이라고 몰아붙였고 기성 교단은 ‘그의 투쟁’을 ‘대화’라는 장으로 이끌려 했다.

어찌 됐든 그는 강연장에서 인분 투척에 따른 수모를 당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이단연구자 탁명환(1937~1994·전 한국종교문제연구소장)처럼 누군가의 표적이 돼 살아야 했다. 탁 전 소장은 결국 이단 교회 신도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요즘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전쟁 중이다. 멀쩡한 예배당이 이단에 접수되는 경우가 적잖다. 예배당 건축을 무리하게 하다가 매물로 내놓으면 이단이 매입하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정통 신학교조차 이단에 넘어간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 출입문에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 스티커를 붙였다.

15개 언어 독해 ‘진짜 박사’

1957년 11월 7일 동아일보 가정면. ‘여성과 신흥종교’라는 큼지막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긴 기사의 바이라인이 ‘S記’이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글이다.

‘사교성을 띤 신흥종교의 80%는 부녀자층이다. 경상도의 천지대안교, 충청도의 백백교, 전라도의 태극도 등이 신앙의 자유에 편승한 대표적인 것들인데… 사변(6·25전쟁) 후 근대화된 신흥종교에 휘몰린 광신도들이 끼치는 해독은 과거와 족히 비할 바 없는… 근대화된 신흥종교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외래 종교를 비롯하여 문선명씨의 통일교회 그리고 요즘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는 박태선씨의 감람나무교(혹은 전도관)운동 등을 말하는 모양이다.…’

S 즉 신사훈은 이 글에서 자신이 책 ‘이단과 현대의 비판’에서 쓴 주장을 마치 다른 사람 얘기처럼 옮겼다. 그만큼 이단 지칭 문제는 민감하고 위험했다.

신사훈은 이단 감별 종교운동가가 아니었다. 신학자였다.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한 세기를 빨리 태어난 분과 같은 천재성을 지녔다”며 “그의 앞서간 신학 체계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학자 겸 철학자 도올 김용옥을 비슷한 학자 유형으로 들었다.

신사훈 고창 생가. 명창 신재효가 살던 집. 경향신문 제공


신사훈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84)의 현손이다. 전북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서 자라 당시 명문 고창고보를 나온 수재였다. 그는 새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고보 시절 영어교사가 영어 성경을 권하자 경성에 신약성경을 주문해 읽을 정도였다. 졸업할 때까지 25번 성경을 통독했다. 그는 그 시절 교회에서 기도로 날을 새다시피 해 ‘신사무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창읍성이 산기도 장소였다.

고창고보 동창회. 가운뎃줄 왼쪽 세 번째가 시인 서정주, 그 다음이 신사훈(1982년). 경향신문 제공


그는 언어·수학 등에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우등·수석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에서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불어 독어를 독파해 깨쳤다. 그리고 1937년 미국 드루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마쳤다.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받은 한국인 수재였다. 뉴욕대학과 스탠퍼드대학 교수(1942~1945)도 역임했다. 15개 언어 독해가 가능했다.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이 따랐다.

미국 유학 시절(1945년 무렵) 모습.


그는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을 거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1947~76)로 봉직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가 그를 영입하려 끈질기게 노력했으나 “내가 그런 시시한 것을 왜 해”라며 거절했다. 그는 신학자·목회자의 길만 걷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운동을 주창하며 인간의 내적 개조를 촉구했다.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는 배척했다.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 것들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분개했다. ‘공산주의 비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의’ 등의 저서 제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근처 풍산공원묘지 안에 있는 신사훈 묘와 비석. 신세희 제공


신사훈은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박태선과 문선명은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함석헌(1901~89·기독교사상가)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불화를 겪었다. 어쩌면 결이 다른 지식인의 신앙적 신념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군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돈키호테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 소망이 없다”

그는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니 새싹운동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드러나지 않는 신흥종교들이 기성 교단에 끼어들어 특히 부녀자들을 흔들고 있는데 대부분은 그들도(이단들도) 역시 기성 종교들이 부패하고 낡았다고 주장한다”는 그의 분석은 마치 요즘 교계 현실의 실사판이라고 해야겠다.

서울 명륜동 천부교 명륜교회(흰색 건물) 골목. 새싹교회 반대편에 있다.


그는 결국 똥물을 뒤집어썼다. 68년 서울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리대 주최로 열린 ‘유사종교 비판강연회’에서 인분 테러를 당한 것이다. 79년 4월에는 서울 남대문교회 교육관 신앙강좌에서 폭행 사건도 겪었다. 새싹교회 강단에 들이닥친 반대파들이 “신 독사!”라고 외치며 붙잡아 꿇어 앉히고 자신들에 대해 비방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가 서울대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을 때 기자들이 은퇴 후 어떻게 살지를 물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게 내 생의 목표입니다.” 아들 신세희 전 중앙대 교수는 “아버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신 분으로 오직 복음에 목숨 건 분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6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