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 바오로 성인(Paul)=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는 당대의 유명한 유대인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회심할 때까지는 사울이라 불렀다. 천막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던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파였고,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박해자였다. 그는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34-36년 사이). 이 환시는 그의 극적인 개종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후 설교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는 즉각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그에 대한 위협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타(Aretas) 왕의 총독이 바오로를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밤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성벽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갔고, 3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났으며, 바르나바(Barnabas)의 지원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입적하였다.

그 후 그는 타르수스(Tarsus)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43년경에 바르나바에 의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으며 그곳 교회의 교사가 되었다.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대 전교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여행을 하게 된다.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키프로스(Cyprus),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를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베드로(Petrus)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가일층 진보된 단계를 맞게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2차 전교여행을 계획한다(49-52년).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갔고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리피(Philippi),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베레아(Berea)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Athenae)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 법정 진술만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로 귀향한 그는 다시 제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Corinthos)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에페수스(Ephesus)에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 사건이 유명하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개종을 설명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60-61년 사이에 몰타(Malta) 연안을 따라 로마(Roma)에 갇히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에페수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에우세비우스의 견해). 테르툴리아노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치명 하였다.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코린토스에서 57-58년); 코린토 1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코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티아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1, 2서(코린토스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티모테오서와 티토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 듯하다.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에 지낸다.

극적인 회심을 통해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해 복음 선포에 온 삶을 봉헌한 순교자다.

우리에게 ‘사도’로 익숙한 성인이지만, 사실 성인은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베냐민 지파의 유다인이자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성인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던 바리사이파였다.

사울이라고도 불리던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박해에 앞장섰고, 스테파노 성인을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성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성인은 부활한 예수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만남 이후 사울은 사흘 동안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마실 수도 없었는데 하나니아스를 만나 다시 볼 수 있게 됐고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예수와 성인의 만남이나 성인의 심경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만남을 통해 완전하게 회심한 성인은 박해를 위해 간 다마스쿠스에서 오히려 누구보다도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성인은 단순히 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고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선교여행을 떠났다. 3차례에 걸쳐 이뤄진 성인의 선교여행으로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레아, 에페소, 코린토 등지에서 선교했고 수많은 교회 공동체를 일궜다.

성인의 선교여행은 예루살렘 일대에 머물렀던 초기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성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성인은 박해로 투옥되기도 했는데, 자신이 선교한 모든 교회 공동체에 방문할 수 없는 어려움을 편지를 통해 해결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 27권 중 편지, 즉 서간은 21권이다. 그중 저자가 성인의 이름으로 저술된 성경은 무려 14권에 달한다.

성인의 편지, 즉 서간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공적인 선언을 다루고 있어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된 길로 들지 않도록 하는 성경이다.

성인은 스스로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선교했지만, 편지를 통해서도 선교를 했던 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성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서간들도 있지만, 성인의 권위로 쓰여 졌다는 점에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느낄 수 있다. 성인은 67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흥순 페이스북

서울 성균관대 입구에서 학교 정문을 향해 걷다가 정문 즈음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성대와 창경궁 담 사이의 길이 이어진다. 세모꼴 마을의 막다른 길이다. 길 끝은 성대 캠퍼스와 창경궁으로 막혔다. 그 막힌 지점에 절개지를 파고든 기형적 형태의 옛 우물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은 ‘왕의 우물’이라 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서울 새싹교회 지하에서 성경 원전 공부 지도(1989년).


그 우물 앞으로 평범한 2층 양옥이 자리한다. 예전 새싹장로교회다. 지금은 성대생을 주 입주자로 받는 원룸형 양옥이 됐다. 이 새싹교회는 2000년대 초반 시나브로 폐쇄됐다. 1950~80년대 한국 사회와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태선 문선명을 둘러싼 이단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신사훈(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박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곳이다.

신사훈 (1911~1998)


신사훈의 ‘나의 투쟁’은 외롭기 짝이 없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흉악한 이단 사냥꾼”이라고 몰아붙였고 기성 교단은 ‘그의 투쟁’을 ‘대화’라는 장으로 이끌려 했다.

어찌 됐든 그는 강연장에서 인분 투척에 따른 수모를 당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이단연구자 탁명환(1937~1994·전 한국종교문제연구소장)처럼 누군가의 표적이 돼 살아야 했다. 탁 전 소장은 결국 이단 교회 신도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요즘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전쟁 중이다. 멀쩡한 예배당이 이단에 접수되는 경우가 적잖다. 예배당 건축을 무리하게 하다가 매물로 내놓으면 이단이 매입하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정통 신학교조차 이단에 넘어간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 출입문에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 스티커를 붙였다.

15개 언어 독해 ‘진짜 박사’

1957년 11월 7일 동아일보 가정면. ‘여성과 신흥종교’라는 큼지막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긴 기사의 바이라인이 ‘S記’이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글이다.

‘사교성을 띤 신흥종교의 80%는 부녀자층이다. 경상도의 천지대안교, 충청도의 백백교, 전라도의 태극도 등이 신앙의 자유에 편승한 대표적인 것들인데… 사변(6·25전쟁) 후 근대화된 신흥종교에 휘몰린 광신도들이 끼치는 해독은 과거와 족히 비할 바 없는… 근대화된 신흥종교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외래 종교를 비롯하여 문선명씨의 통일교회 그리고 요즘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는 박태선씨의 감람나무교(혹은 전도관)운동 등을 말하는 모양이다.…’

S 즉 신사훈은 이 글에서 자신이 책 ‘이단과 현대의 비판’에서 쓴 주장을 마치 다른 사람 얘기처럼 옮겼다. 그만큼 이단 지칭 문제는 민감하고 위험했다.

신사훈은 이단 감별 종교운동가가 아니었다. 신학자였다.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한 세기를 빨리 태어난 분과 같은 천재성을 지녔다”며 “그의 앞서간 신학 체계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학자 겸 철학자 도올 김용옥을 비슷한 학자 유형으로 들었다.

신사훈 고창 생가. 명창 신재효가 살던 집. 경향신문 제공


신사훈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84)의 현손이다. 전북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서 자라 당시 명문 고창고보를 나온 수재였다. 그는 새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고보 시절 영어교사가 영어 성경을 권하자 경성에 신약성경을 주문해 읽을 정도였다. 졸업할 때까지 25번 성경을 통독했다. 그는 그 시절 교회에서 기도로 날을 새다시피 해 ‘신사무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창읍성이 산기도 장소였다.

고창고보 동창회. 가운뎃줄 왼쪽 세 번째가 시인 서정주, 그 다음이 신사훈(1982년). 경향신문 제공


그는 언어·수학 등에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우등·수석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에서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불어 독어를 독파해 깨쳤다. 그리고 1937년 미국 드루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마쳤다.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받은 한국인 수재였다. 뉴욕대학과 스탠퍼드대학 교수(1942~1945)도 역임했다. 15개 언어 독해가 가능했다.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이 따랐다.

미국 유학 시절(1945년 무렵) 모습.


그는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을 거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1947~76)로 봉직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가 그를 영입하려 끈질기게 노력했으나 “내가 그런 시시한 것을 왜 해”라며 거절했다. 그는 신학자·목회자의 길만 걷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운동을 주창하며 인간의 내적 개조를 촉구했다.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는 배척했다.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 것들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분개했다. ‘공산주의 비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의’ 등의 저서 제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근처 풍산공원묘지 안에 있는 신사훈 묘와 비석. 신세희 제공


신사훈은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박태선과 문선명은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함석헌(1901~89·기독교사상가)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불화를 겪었다. 어쩌면 결이 다른 지식인의 신앙적 신념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군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돈키호테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 소망이 없다”

그는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니 새싹운동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드러나지 않는 신흥종교들이 기성 교단에 끼어들어 특히 부녀자들을 흔들고 있는데 대부분은 그들도(이단들도) 역시 기성 종교들이 부패하고 낡았다고 주장한다”는 그의 분석은 마치 요즘 교계 현실의 실사판이라고 해야겠다.

서울 명륜동 천부교 명륜교회(흰색 건물) 골목. 새싹교회 반대편에 있다.


그는 결국 똥물을 뒤집어썼다. 68년 서울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리대 주최로 열린 ‘유사종교 비판강연회’에서 인분 테러를 당한 것이다. 79년 4월에는 서울 남대문교회 교육관 신앙강좌에서 폭행 사건도 겪었다. 새싹교회 강단에 들이닥친 반대파들이 “신 독사!”라고 외치며 붙잡아 꿇어 앉히고 자신들에 대해 비방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가 서울대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을 때 기자들이 은퇴 후 어떻게 살지를 물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게 내 생의 목표입니다.” 아들 신세희 전 중앙대 교수는 “아버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신 분으로 오직 복음에 목숨 건 분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6430

1.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믿습니까?

2. 본 장로회 신조와 위시트민스터 신도게요 및 대소 요리문답은 신구약 성경의 교훈한 도리를 총괄한 것으로 알고 성실한 마음으로 받아 신종하십니까?

3.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 조례와 예배 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승낙하십니까?

4. 주 안에서 같은 직원인 형제들과 동심협력하기로 사약하십니까?

5. 목사의 성직을 구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 독생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본심에서 발생한 줄로 자인하십니까?

6. 어떠한 핍박이나 반대를 당할지라도 인내하고 충심으로 복음의 진리를 보호하며 교회의 성결과 화평을 도모하여 근실히 역사하기로 작정하십니까?

7. 성도요, 겸하여 목사가 되겠은즉 자기의 본분과 타인에 대한 의무와 직무에 대한 책임을 성실히 실행하여 복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께서 그대에게 명하사 관리하게 하신 교회 앞에 경건한 모본을 세우기로 승낙하십니까?

매일경제 170713신촌교회 오창학 원로목사 "제 삶이 곧 제 설교라고 생각해요"
출처 : 매일경제 | 네이버 뉴스
 http://naver.me/FT1Mbn5W

http://blog.naver.com/algiebha/220315491974

영적 거인 -고 김현봉 목사
yoel | 2015.11.23 12:40
 요즘에 이르러 목사로서 참다운 선배와 스승은 누구일까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나도 조금은 나이들어가면서 철이 드는가 보다.
 그러면서 요즘 목사들이 왜 그러는지, 무슨 비리에 연루되거나 각종범죄가 보도될 때마다 목사라는 직함이 따라 다니니 어찌할 바 모르겠다.
 왜 그럴까? 여러 가지 대답 중에서 아직도 그리스도를 닮지 못한 이유일 수 있고, 세상적인 물질의 욕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목회하기가 예전처럼 쉽지 않은 까닭도 있을 것이고, 목사들의 수준이 하향평준화 되어서 자질이 떨어지기도 한 것일 수도 있고, 교인들이 순수하지 못함으로 그에 대한 부적응자가 목사가 된 것일 수도 있고, 하여간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다.
 오늘같이 혼잡하고 타락한 목사들을 보면서 문 듯 떠오르는 목사가 있으니 그는 고 김현봉 목사(1884-1965)다.
 나는 그 분을 직접 만나보거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글에서 보면 그는 평생 예수님의 청빈과 순결로 목회하신 분이다.
 몇몇 글에서 보면 감동과 부끄러움과 만나고 싶음이 간절해 지는 것을 보니 그는 진저 한시대의 스승이며 목사의 선배인 것이다. 그 분에 대한 글들을 모아 보며 그 분을 그려본다.
 
 김현봉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나오고, 한 때 서울 아현동에서 기성교회 목회를 했으나, 교회 장로들 때문에 실패하고 교회를 사면하고 나와 마포구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 7명 교인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였다.
 닭장을 개조하여 집을 만들어 예배를 드렸으며 계속 가난한 자들과 함께 검소하게 살았다. 별세 할 때 1,000명의 교인이 있어도 그의 생활은 거지에 가까운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1884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세 친구와 함께 동대문 감리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방이 되자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은 생각으로 많은 날들을 고민하던 애국청년은 1912년 월남 이상재의 소개장을 받아 가지고 중국 서간도 땅으로 건너가 교포 2세를 위해 한국학교를 세워 한국 역사를 가르쳤고, 다시 러시아 로 옮겨 학교를 세우고 한국말과 한국역사를 가르쳤다. 그 후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 생활 중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구상을 하게 되었다.
 1923년 출감해서 이듬해에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구체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40세에 신학생이 된 김현봉은 열심히 공부했다.
 1928년 제23회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공덕리 교회를 맡게 되었다. 경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후에 공덕교회를 사임하고, 1932년 3월 31일 아현동 37번지에 일곱 사람이 모여 아현 교회 개척예배를 드렸다.
  그가 아현교회를 개척한 48살 때인 1932년이었다. 교회의 터는 아현동 37번지는 공동묘지였으며 큰 소나무들이 꽉 들어 차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 초에 일본의 경제개혁 실패로 농민들이 몰락하게 되자, 이들 중 일부가 아현동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 빈민촌이 형성되었는데, 김목사는 이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주기로 하였다.
 
 일제는 1930년 들어서서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고, 이들의 압박에 못 이겨 1938년 제27차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게 되자, 큰 충격을 받고 김현봉 목사는 ‘자신과 교회를 어떻게 해야 바르게 살 수 있을까?’는 제목으로 기도하던 중 십자가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낮아지고 스스로 고난을 짊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몸에는 철저하게 누더기를 걸치고, 궂은 음식을 먹고, 머리를 밀어버리고, 고무신을 신고 가장 낮은 자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을 하였다. 교회에는 간판, 종, 종탑, 십자가, 의자, 성가대, 악기, 장로가 없었다. 목사 자신이 검소한 옷을 입고 다니기에 교인들 역시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비가 오면 검은색 우산을 쓰고, 성경 찬송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하면서 길거리를 누비며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김목사는 삼각산에 들어가 39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기도 중 회개기도가 터져 15가지 이상의 죄를 하나씩 고백하며 크게 은혜 받은 체험이 그의 목회생활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기 시작을 하였고, 원고 설교에서 영감 설교로 바뀌어 설교 중에도 하나님의 영감이 계속 임했다고 한다.
 전쟁 후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이 생기게 되자 사회 복음화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봉사와 구제 사업을 펼쳐 나간다.
 70의 나이에도 상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토요일에는 쌀밥과 고기 국을 끓여 배고픈 이웃을 대접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형식주의, 교권주의를 배격하는 동시에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교인이 늘어나면 자기가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예배당을 넓히면서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엔 관심이 없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 광선이 잘 들고, 예배드리기에 불편하지만 않으면 되었다. 교회가 산비탈에 있었기에 늘 정과 망치를 들고 바윗덩이를 일일이 깨 가며 예배장소를 확장했고, 기둥이 많아 일명 ‘기둥 교회’, 초라하여 ‘누더기 교회’의 별명이 있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교인들을 보면 어느 피난민 수용소나 거지떼들이 흩어져 나오는 광경 같았다. 그러면서도 전 교인이 십일조를 드리게 하고 연보는 김목사 자신이 관리를 하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기에 한푼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오직 전도와 구제하는데 쓰기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헌금은 진정한 영혼을 길러 주기 위해 수고하는 인근 교역자들과 신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었다.   교단에 들어가지 않고 독립교회로 있었다. 목사의 사례금은 교회에서 정해지지 않고 목사의 생활을 위해서는 별도로 연보함을 만들이 교인들이 자유로이 넣도록 했다.
  
 주일날은 오전 예배를 마치고 사모가 국수기계로 손수 만든 밀국수를 전 교인에게 대접했고, 잠시 쉬었다가 오후 2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교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어린아이는 자전거 뒤에 싣고 장사하고, 어른은 리어카에 실어 벽제 화장터에 가서 화장했다.
 결혼식은 교회에서 사경회 하는 도중 쉬는 시간에 신랑 신부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불러 앞자리에 세우고 “잘 살겠소?” 하고 묻고 기도해 주면 끝이다.
  예배는 두 시간이나 길게 드리는데도 교인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있고, 남자 성도들은 김목사처럼 머리를 삭발하고 바지저고리 입는 이가 많았다. 김목사는 키가 작으며, 삭발하고 항상 검은 두루마기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의 별명이 “중목사”라 했다.
 그 교회의 여자들도 사치한 색깔의 옷은 입지 않고 한동안 머리에 파마도 못하게 했다. 모든 형식을 무시하고 김목사는 때때로 강대 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아가면서 설교를 했다. 사경회에 다니다가 힘들 때는 강대상 위에 올라가 타고 앉아서 설교하기도 했다.
  김 목사의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김 목사만큼 하나님과 단둘이 만나는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찬송은 하나님과 연락해서 영혼으로 부르는 것이지 자기 육체가 흥분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요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회개해 양심을 찾아 자신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그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누구든지 자기가 된 만큼 밖에 남을 만들지 못하는 법이니 요는 나 하나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다. 내가 바로 서지 못하고 누구를 바로 서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김현봉목사의 사생활은 저녁 5시경이면 잠자리에 들고 밤 12시에 기상해서 고요히 단좌해 묵상에 잠기고 새벽 4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면 연세대학교 뒷산에 작게 마련한 기도실 마당에 있는 나무에 기대어 묵상에 들어간다.
 낮 12시까지 그런 모양으로 머문다. 오후에는 심방을 다녔는데 아현동 일대에 교인들 집을 하루에 70호를 심방하는 때도 있었다. 교인 집에는 일일이 들어가 앉아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문 밖에서 “별일 없소?” 묻고 지나가고 간혹 가난한 교인 집에는 부엌에 들어가 연탄불이라도 피웠나 해서 방바닥에 손을 대보는 것이 심방이었다.
  다른 교회에서 불만이 있어 찾아오는 떠돌이 교인은 받지 않고, 친히 자기 손때를 묻혀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회를 만들어가며 성장을 시켰다. 70세 넘어 81세 별세할 때까지 그의 목양 일은 계속 하였는데 교인수가 1200명까지 되었다
  1965년 3월 12일 소천한 김현봉 목사의 시신은 생전 김목사의 정신에 따라 리어카에 실어 끌고 갔다. 그 뒤를 1200성도들이 따라 갔으며, 시신은 화장을 했다.
 
  
김현봉 목사님의 목회 방침과 교훈의 특징
 
(1) 목회 방침
  1) 찬양대, 학생회, 청년회를 특별히 두지 않았다.
  2) 주일성수 강조
  3) 자발적 연보 가르침(헌금, 선행은 하나님만 아시도록 비공개)
  4) 친목회, 야외예배, 망년회, 찬양 새벽 송, 어머니주일, 약혼식폐지
  5) 국산품 애용 강조
  6) 삼분설 주장(영, 혼, 육)
  7) 천국은 다 평등이 아니다(천국에서는 큰 자와 작은 자가 있다)
  8) 목회, 치리, 재정, 유년주일학교, 심방 전담.
  9) 한복을 즐겨 입으심.
  10) 밥을 먹으라고 했을 때 먹었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11) 하루 7-8시간 기도하셨다(15일을 앉아 계신 적이 있다고 함)
  12) 점심은 항상 국수를 하시고, 국수를 대접하셨다.
  13) 하루 수면 시간은 3-5시간뿐이다.
  14) 오전 시간은 기도, 성경공부, 오후는 심방과 전도와 교회 일을 하셨다.
  15) 장례는 리어카로 운반(심지어는 관이 없어도 무방)
 
(2) 교훈의 특징
  1) 10대 특수 교훈
   1. 삼가하고 조심하라
   2. 양심을 똑바로 써라(양심과 말씀에 순종하는 정신을 가지라)
   3. 일심정력
   4. 구원을 이루라(성화구원)
   5. 명예, 영광심을 버리라
   6. 나 하나 만들라
   7.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풍속, 습관을 버리라.
   8. 지식중심주의를 버리고 믿고 실행하라.
   9. 인본주의를 버리고 신본주의로 살라.
  10. 개교회주의
  
2) 그밖에 강조하시고 가르치신 말씀들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기도하고 성경보고 묵상하라
  2. 예수 믿는 것은 남을 위하여 믿는 것이다
  3. 교회 직원 많이 내지 말라
  4. 참되고 진실 되고 정직하라. 옳고 착한 일을 하고,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용납하고 참고 견디고 덕을 길러라.
  5. 겉 사랑하지 말고 그 영혼에게 참 유익을 주는 참 사랑을 하라.
  6. 물질적 신앙적 자립정신을 길러라.
  7. 교회사업주의를 버리라.
  8. 결혼식 간소화
  9. 물질(돈, 전기, 의복, 음식, 건물)을 절약하고 남용치 말라.
  10. 자녀에게 어려서부터 믿는 도리를 가르치고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라.
  11. 쉬운 것부터 믿고 실행해 나가라.
  12. 들어오는 대로 종횡으로 열을 맞추어 앞자리부터 앉아라.
  13.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가다듬고 고요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라.
  14. 이자놀이 하지 말고 계하지 말라.
  15. 강단을 꾸미지 말라(성경을 올려놓고 강도(講道)할 수 있으면 족하다).
  16. 예배시간을 엄수하고 약속을 지키라.
  17. 찬송가를 뜻을 생각하며 불러라.
  18. 혈기를 이겨라.
  19. 극장가지 마라.
  20. 우상의 제물, 피, 목매여 죽은 짐승 먹지 말라.
  
3) 목사에 대한 교훈('택함 받은 일꾼의 자격과 신덕', 딤전 4:10-16) :
 택함 받은 일꾼은 열심과 힘을 드리며, 양을 자기의 뼈와 살과 같이 사랑하여 교인과 목자가 통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일꾼은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사랑이 쏟아져 나오고 피땀이 섞이어 나오는 것이다. 목자를 알아서 따라온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양들에게 보이어야 할 것이니 영혼의 키가 장성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덕이 자라고 선의가 더욱 자라나는 것을 보이라는 말씀이다. 묵상, 성경 보는 일, 기도, 궁구하는 일을 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일, 잘 해야 한다.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 먼저 자기가 은혜를 받는 것이며 연단하는 것이다.
 전심전력을 강도(講道)에 기울여 해야 하는 것이다.
 몇 시간 준비해서 하려고 하는 것은 품팔이 일꾼인 것이다.
 교인이 온 것은 영의 양식을 먹으려고 왔는데 굶어간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연구가 부족하고 궁구가 부족하고 정도가 유치해도 일심정력을 기울여 공만 들이면 그 강도(講道)는 하나님이 가르치게 하는 것이다. 강단을 아무나 가르치게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꾼이 되려면 먼저 믿고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가 먼저 실행하고 자기를 만들어 정직하고 진실하고 사람이 되어 가르칠 때에,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아서 믿는 자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가 실행치 않고 입으로만 가르치니 마귀의 종이요, 자기가 되지 못하고 가르치니 못된 것 가르쳐 놓으니 결단날 일만 해놓는 것이다.
 일꾼이 된 자는 피땀을 흘리지 아니하고는 못하며,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피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실행하라고 하면서 자기는 얼마나 실행하는가?
 앵무새와 같이 가르치고 지식으로만 배워서 가르치니 이런 사람으로 말미암아 도를 가리우는 것이다.
 교인의 사정을 함부로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유익이 되지 않는 말은 내놓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이고 인도자인데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나오는 자를 모두 성자를 만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너무 다 잘 만들려다 낙심하기 쉬우니까 교인의 처지를 보아서 차차 잘 인도해야하며, 자라기를 바라고 길러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완전하여도 쓰시는 것이다. 쓰되 길러가면서 쓰시는 것이다. 자기가 의로운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이며 회개하고 바로 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진저.
 목자는 파수꾼이요 목자이니 나보다도 양을 위하여 바로 자기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목자가 양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은 본능이며, 내가 희생하는 것이 교인을 살리는 것이며 즉 나를 살리는 것이다.
 교역자는 교회 일을 볼 때에 사람을 의지하여 일하면 안 되고 하나님과 손을 잡고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을 의지하니 하나님은 배척하고 사람이 교회를 세우려하니 되지 않는 것이다.
 교역자는 남의 생명을 맡은 자이니, 육신의 오락을 취하지 말고 희생해야 한다.
 자기가 연구해서 가르치는 것이 은혜가 되고 힘이 된다.
 강도(講道)를 할 때 은혜를 받아 신자가 좋아한다. 그러면 자기가 잘 한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일시적 감동인가, 행위가 변화하는가 보라.
  
4) 장로에 대한 교훈
  장로가 교회를 지어서, 쥐고 펴고 하는 것이면 이는 장로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가 교회의 주인도 아니며 목사도 주인이 아니요, 주인은 그리스도인 것이다. 금일 장로는 주인이요 목사는 품팔이꾼이 되는 것이다. 목사가 만일 장로를 책망하는데 받지 않으면 목사를 쫓아내는 것이다. 장로는 목사의 조력자이다. 현재 장로는 권세를 부리고 교회주인 노릇하여 일꾼 내쫓고 하는 것은 저주받을 일이다. 장로가 장로 일을 못하면 장로가 교회의 분쟁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5) 신자에 대한 교훈
 부모는 육신을 기른 자이나 일꾼은 나의 심령을 기르는 자인 줄 알고 영혼의 선생인 줄 알고 고맙고 감사함으로 배워야 한다.
 실행하기 위해 배워라, 말씀을 지식으로만 배우게 되면 양심의 자유를 못 누리니, 듣고 실행해야 한다.
 예수 믿는 데 폐물 된 사람, 아무데 가나 사람 노릇 못한다.
 이 좋은 교훈 배우지 못하는데 어디 가서 사람 노릇 하는 것 배우겠는가? 사람 노릇하려면 용서하고 참고 견디고 용납하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교회 일 잘 할 수 없는 것이다.
 책망과 옳은 말을 해주면, '고맙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했으면 캄캄한 데 행할 뻔 하였는데 가르쳐주시니 참 감사 합니다'할 것이다.
  옳은 것을 사모하는 마음, 양심 쓰는 마음, 이것 먼저 만들라.
  먼저 마음을 돌이키고 자기 만들어 나가는데 힘써라.
  자기가 타인에게 좀 낫다는 칭찬을 받는 자, 정신 차려야 한다.
  잘못 하면 자기의 의(義) 그것만 의지하니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바른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음식을 먹되, 덕을 세우기 위해 먹고 유익하려고 먹는데 해되게 먹으면 안 된다. 먹을 때에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식물에 대한 절제, 이것도 선한 싸움이다.
  기술과 지식만 배워 가지고는 안 된다.
  인격이 없으면 그것은 악하기 때문에 자기를 망치는 것이다.
원문 링크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BuBc&articleno=18334832

김현봉 목사님께서 개척하신 아현교회에서 자랐습니다.
우리가그러하도다
계약신학 석진태강도사 카페 우리가그러하도다

크리스천헤럴드

http://blog.daum.net/younnews0123/5802162

 

35년 전 사명 하나 붙들고 수원시 영통구에서 목회를 시작한 송태섭 목사가 교우들에게 늘 강조한 것은 “진실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철저한 말씀중심의 초대교회를 지향해 온 그는 교회 내적 성숙함을 바탕으로 예장 고려개혁 총회와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성실한 모범을 보이고 있다.

교단의 설립 멤버이면서 부총회장과 총회장을 역임한 송태섭 목사가 교단 총무로 10년 이상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것은 한국교회연합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위해서다.

"교단 규모가 작아서 본의 아니게 총무 일을 10년 넘게 맡고 있는데, 제가 총회장 재임시절 후배들을 위해 한기총에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올해로 설립 23주년이 된 예장 고려개혁은 예장 고신 총회에서 갈라져 나왔고, 보수 중에서도 상보수로 통한다. 오랫동안 연합 사업에 동참을 하지 않았었는데, 후배들을 위해서는 혼자 독불장군으로 있을 수는 없다는 송 목사의 생각이 교단 내에 공감대를 형성시킨 것이다.

그가 2년의 총회장 임기를 마치고 나니 후임 총회장이 한국교회 연합운동에 교단 대표로 나서주기를 요청하면서 총무를 맡아달라고 한 것. 그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기총 총무협의회 회장과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총무를 역임하면서 연합사업의 중심에서 섬겨온 바 있는 송태섭 목사는 경기경찰청 경목위원과, 수원 남부경찰서 경목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수원시기독교총연합회 공동회장과 한기총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안정과 연합운동이 바르게 세워지는 일에 일익을 감당하면서 여호수아 같은 후계자를 세우는 것이 현장 목회 4년을 남겨두고 있는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라는 송태섭 목사의 35년 목회 이야기를 들어봤다.

초대교회 같은 교회 지향

사업 실패나, 불치병 같은 극적인 사건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송태섭 목사는 잘나가던 사업을 돌연 정리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선다. 예장 고신 측 교회였던 서울 만리동교회에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바르게 배우며 집사로 섬기던 그는 어느 날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폭풍처럼 몰려와 거부할 수 없게 됐다. 계약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평생 스승인 이병규 목사를 만나게 된다.

"제가 그 어르신을 만난 것은 큰 복입니다. 목사로서 본받아야할 게 너무 많습니다. 신앙의 정조, 진실함, 깊이 있는 성경연구 등... 헤아릴 수 없죠. 지금도 매주일 산 기도를 가시고, 두 달에 한 번은 교단 내 전 교역자가 산 기도를 하고 있어요. 계신 총회는 일당백입니다. 한 사람이 백의 몫을 감당할 정도로 신앙으로 잘 무장 돼있어요."

스승 이병규 목사는 오로지 예수님 중심의 목회였고, 삶이었다고 말하는 송태섭 목사는 자신의 목회가 그 어른을 닮아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었고, 지금도 진행형임을 고백한다.

송 목사 역시 오랫동안 산기도로 영적 무장을 해왔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황무지 같은 수원 영통지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해도 목회가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몰랐고, 가난한 지역에서 서민들과 함께 살아보겠다는 마음이 전부였다. 산 기도는 그가 목회의 힘을 얻는 원천이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길이었다. 특히 개척 초기 뒷산에 굴을 파고 기도에 열중할 때는 간첩으로 오해받아 수원 정보과 조사도 받았다.

1977년 10월 2일 첫 예배를 드리고 다음해에 교회 부지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건축했다.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교회에 바쳤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은 크지 않았으나, 문제는 그 부지에 주민들이 수호신처럼 여긴 당산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수원시청으로부터 허가를 받고 나무를 베어냈지만,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거센 항의에 부딪혔고 지역사회 정착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영적싸움 또한 만만치 않았으나, 그럴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이 신앙의 힘이었다. 처음에는 이곳에 흙벽돌 20평 예배공간을, 다음에는 50평, 그리고 대지 300평 건평 350평의 현재 교회가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지역의 어려운 이웃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노력은 처음 출발부터 시작됐다. 리어카와 자전거, 광주리 등을 구입하여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과일, 배추, 생선 등 각종 물품을 팔아 생업에 종사하도록 도왔다. 80년대 초에는 주택 7채를 건축해 어려운 주민들이 생활할 수 있는 주거환경을 조성해 주기도 했다. 당시 교회의 도움으로 생활고를 달래던 사람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자녀들을 성공적으로 키우고, 안정적인 생활을 할 뿐 아니라 그들이 현재 교회의 기둥이 되어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데 앞장서고 있다.

지금도 경원교회는 교회주변에 주택 4채를 지어 어려운 성도들이 생활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연말이면 가난한 지역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외국인 학생 장학금 지원 등 성숙한 나눔의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선교원으로 시작된 어린이집은 25년 역사를 자랑할 정도로 주민들을 가까이서 섬겨왔다.

또한 경찰 선교를 비롯하여 농촌교회 지원, 신학교와 월드비전선교회, 수원기독교호스피스 등 단체를 후원하며 사역에 동참하고 있다.

2007년에는 캐나다에 에벤에셀교회를 개척해 교역자를 파송한 경원교회는 2010년도 필리핀에 선교사를 파송하면서 해외선교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캐나다는 송태섭 목사가 직접 선교사로 활동하던 곳이라 각별하다. 자녀들 중 자신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했지만, 꿈으로 끝나면서 송 목사는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두 형제들에게 선교사를 도와 교회다운 교회, 초대교회같이 이 시대 본이 되는 교회를 이루어 보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해외선교의 비전과 열정을 심어주고, 실천하기 위해 해마다 단기선교를 실시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12차례 진행되고 있다.

차별화된 믿음 차별화 된 삶

경원교회는 지금도 주일에 물건을 사거나 파는 것을 금하고 있으며, 오락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온전히 주일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다. 당연한 일이면서도 현실적으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며, 경원교회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주일 저녁예배를 오후 2시에 드리기 시작한 것은 선두주자에 가깝다. 모교회에서 배운 데로 자신의 목회에 적용했고, 초기 교우들은 도시락을 갖고 와서 서로 나눠먹으며 초대교회처럼 친교를 나누고 온전히 주일을 지키게 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이단이라는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었는데, 우리가 잘 아시다시피 지금은 일반화되어 있는 일이다.

한 때는 개발지역으로의 교회 이전도 생각해 보았으나, 하나님이 정해준 자리에서 작더라도 바르게 하자는 생각이 더 강했던 탓에 35년을 수원시 영통구를 떠난 적이 없다. 그러다보니 이 지역이 개발지역이 되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더욱이 교우들 상당부분이 20년을 훌쩍 넘긴 뿌리 내려진 신앙인들이라 교회는 더욱 견고해진 상태다.

현재 동 교회는 장로가 다섯 명인데 이들 중 3명이 올해 은퇴를 하고 그 뒤를 이어 3명의 장로가 새롭게 세워질 예정이다. 은퇴하는 장로 3명은 올해 65세로 아직 법적 은퇴시기는 아니지만 후배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기위해서다.

그러면서 아주대학과 교회주변 대학에서 청년들의 발길이 이어져 젊은이들의 열정이 가득한 교회다.

"저희 교회는 제2의 논산훈련소입니다. 대학생들이 영적 훈련을 잘 받고 학교를 졸업하면서 해외로 나가는 학생들이 있는가하면, 대학원 진학이나 직장 따라 전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헤어지는 것은 섭섭하고 당장 교회적인 도움은 없다해도, 신앙훈련을 잘 시켜 내보내는 것은 보람이 큰일 입니다."

송태섭 목사는 그들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믿음과 차별화된 경건한 삶으로 전국 각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그것이 한국 복음화에 기여하는 길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실제로 경원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를 개척한 제자들이 10여 명에 이른다. 비록 적은 액수지만 나름대로 생활비 지원 등을 통해 교회의 자립을 돕기도 했다.

이런 점이 경원교회가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내 교회만을 생각지 않고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고,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추구하며, 무엇보다 진실 하라는 담임 송태섭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일은 송 목사 자신이 먼저 진실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송 목사는 시간약속부터 철저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철두철미한 약속이행이 교우들의 신뢰를 얻는 첫걸음이라는 것. "신뢰가 무너지면 권위가 무너집니다. 지도력은 신뢰가 바탕이 돼야합니다."

송 목사는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영적능력과 함께 사람사이의 신뢰임을 언급하면서, 35년간 장기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루하루 진실하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인 것 같다고 말한다. 특히 후배들에게 목회자는 장거리선수라면서, 진실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시간약속 잘 지키기, 거짓말 안하기라고 덧붙였다.

대형 교단 소속도, 대교회도 아니지만, 경원교회가 말씀에 뿌리를 내린 건강한 교회로 세워진 비결일 것이다. 더욱이 코흘리개 주일학교 어린이가 자라서 지금은 장년이 되고 집사와 권사, 장로로 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그들의 자녀들이 다시 이곳에서 반듯하게 자라나고 있다.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될 청소년들이 꿈을 키우고,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있는 청년들이 장년층 대비 높은 출석률을 보이며, 젊은 패기와 열정을 불사르고 있다.

나이 마흔을 넘긴 집사들한테도 송태섭 목사는 자연스럽게 반말이 튀어나오곤 하는데, 이는 개구쟁이 시절부터 성장과정을 지켜 봐와서 부모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개척시절 주례를 섰던 신부의 딸 결혼 주례까지 서게 돼 어머니와 딸을 주례서는 기록도 세우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가 많은 때, 한국교회의 연합운동도 바르게 세워질 수 있고, 한국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2013.11.30~2014.1.5 광복동을 중심으로 LED를 이용한 크리스마스트리축제가 한창이다. 37일간 부산은 물론 전국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니 지역경제 진흥에도 큰 역할을 한다.

행사기간 내내 저녁이면 공연들이 이어진다. 중앙에 대형트리 앞에 설치된 무대에서는 아마도 부산지역 교회 성가대가 돌아가며 성가공연을 하는 모양이다. 신청을 받아 일반 단체 공연도 열린다.

행사장 곳곳에 테마존을 설치해 놓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교회에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는 예배당 모형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길게 줄이 서 있다. 연인들을 위한 고백의 공간도 있고 용두산공원으로 이어지는 빛터널도 인기 코스다.

축제위원회가 주최가 되지만 부산성시화본부 등에서 후원하는 형태다. 시설에는 큰 예산이 들테지만 37일 이라는 장기간 이벤트로 집객효과가 크다.

롯데백화점 광복점 앞에 있는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도착지 기념비 앞에도 따로 조명을 설치해 놓았다.

문화를 이용한 선교의 장으로 크리스마스트리축제는 다른 도시에서도 벤치마킹할 만한 이벤트다.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새들백 교회로 대표되는 마케팅 교회가 엔터테인먼트, 마케팅,심리학 등 세상 문화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간결하고면 명쾌하게 설명한다.

성경 본문을 읽고 그 해석을 한 시간 내내 하시던 강해설교를 들으며 자란 나는 요즘 이십 여 분의 설교를들으면서도 지루하다고 느낀다. 아주 가끔 어린 시절의 강해설교가 그리워 진다.

예배시간에 기타는 절대 들여 놓을 수 없는 사탄의 물건이었고 피아노도 아주 신중하게 논의를 거쳐야 했다. 성가대가 가운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여러 시간 당회에서 논쟁이 필요했다.

한국교회가 이제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일들. 이제 심리학이 성경보다 앞선 판단 기준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하나님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일은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어느새 젖어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미자립교회를 살리기 위한 운동인 미사모 2월 모임이 17일 성광교회에서 열린다.

카페는 http://misamo.onmam.com

평촌도서관뒤 한가람상가 405호 청아한교회

070-8278-5870 김광환 목사

1297758839_미사모1102회보.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