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 바오로 성인(Paul)=바울로,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자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는 당대의 유명한 유대인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하였다.

그가 회심할 때까지는 사울이라 불렀다. 천막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던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파였고, 그리스도교의 열렬한 박해자였다. 그는 스테파누스(Stephanus)의 순교 현장에도 있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하였다(34-36년 사이). 이 환시는 그의 극적인 개종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주었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낸 후 설교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돌아왔다. 그는 즉각 유대인들의 맹렬한 반발에 직면하였는데 그에 대한 위협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레타(Aretas) 왕의 총독이 바오로를 잡으려고 성문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밤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성벽을 타고 도시를 빠져나갔고, 3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났으며, 바르나바(Barnabas)의 지원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입적하였다.

그 후 그는 타르수스(Tarsus)에서 몇 년을 지내다가 43년경에 바르나바에 의하여 안티오키아(Antiochia)로 갔으며 그곳 교회의 교사가 되었다.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대 전교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여행을 하게 된다.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키프로스(Cyprus),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를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했다.

이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베드로(Petrus)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가일층 진보된 단계를 맞게 하였다.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2차 전교여행을 계획한다(49-52년).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갔고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리피(Philippi), 테살로니카(Thessalonica), 베레아(Berea)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Athenae)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 법정 진술만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로 귀향한 그는 다시 제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Corinthos)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에페수스(Ephesus)에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 사건이 유명하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개종을 설명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60-61년 사이에 몰타(Malta) 연안을 따라 로마(Roma)에 갇히게 되었다.

로마의 클레멘스(Clemens)에 따르면 그 후 그는 에페수스,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에우세비우스의 견해). 테르툴리아노에 의하면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참수치명 하였다.

바오로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그리스도교 저술가로 꼽힌다.

로마서(코린토스에서 57-58년); 코린토 1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코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티아서(에페수스에서 54년); 콜로새서, 필리피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1, 2서(코린토스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티모테오서와 티토서를 보냈다. 히브리서는 아마도 다른 저자인 듯하다.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에 지낸다.

극적인 회심을 통해 박해자에서 사도로 변화해 복음 선포에 온 삶을 봉헌한 순교자다.

우리에게 ‘사도’로 익숙한 성인이지만, 사실 성인은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를 만난 적이 없다. 베냐민 지파의 유다인이자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의 문하생으로 예루살렘에서 공부한 성인은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던 바리사이파였다.

사울이라고도 불리던 성인은 그리스도교의 박해에 앞장섰고, 스테파노 성인을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켜주기까지 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성인은 부활한 예수를 만난다. 성인은 부활한 예수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났으며,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8)고 고백하고 있다.

이 만남 이후 사울은 사흘 동안 볼 수 없었고, 먹지도 마실 수도 없었는데 하나니아스를 만나 다시 볼 수 있게 됐고 세례를 받았다.

성경은 예수와 성인의 만남이나 성인의 심경변화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만남을 통해 완전하게 회심한 성인은 박해를 위해 간 다마스쿠스에서 오히려 누구보다도 힘차게 복음을 선포하게 됐다는 것이다.

성인은 단순히 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그치지 않고 로마에서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선교여행을 떠났다. 3차례에 걸쳐 이뤄진 성인의 선교여행으로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레아, 에페소, 코린토 등지에서 선교했고 수많은 교회 공동체를 일궜다.

성인의 선교여행은 예루살렘 일대에 머물렀던 초기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성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성인은 박해로 투옥되기도 했는데, 자신이 선교한 모든 교회 공동체에 방문할 수 없는 어려움을 편지를 통해 해결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약성경 27권 중 편지, 즉 서간은 21권이다. 그중 저자가 성인의 이름으로 저술된 성경은 무려 14권에 달한다.

성인의 편지, 즉 서간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안부를 묻는 편지가 아니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공적인 선언을 다루고 있어 교회 공동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잘못된 길로 들지 않도록 하는 성경이다.

성인은 스스로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선교했지만, 편지를 통해서도 선교를 했던 것이다. 물론 이중에는 성인이 직접 쓴 것은 아니라고 여겨지는 서간들도 있지만, 성인의 권위로 쓰여 졌다는 점에서 성인의 열정적인 선교를 느낄 수 있다. 성인은 67년경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김흥순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