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제목: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끝)

[출처: 개혁신앙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4914/20180113/%ED%95%9C%EA%B5%AD%EA%B5%90%ED%9A%8C-%EC%83%88%EB%B2%BD%EA%B8%B0%EB%8F%84%ED%9A%8C-%EC%9C%A0%EB%9E%98%EB%8A%94-%EC%96%B4%EB%96%BB%EA%B2%8C-%EC%8B%9C%EC%9E%91%EB%90%90%EB%82%98.htm

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제목: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끝)

[출처: 개혁신앙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4914/20180113/%ED%95%9C%EA%B5%AD%EA%B5%90%ED%9A%8C-%EC%83%88%EB%B2%BD%EA%B8%B0%EB%8F%84%ED%9A%8C-%EC%9C%A0%EB%9E%98%EB%8A%94-%EC%96%B4%EB%96%BB%EA%B2%8C-%EC%8B%9C%EC%9E%91%EB%90%90%EB%82%98.htm

_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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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한경직, 박윤선 등과 함께 존경받는 기독교의 어른이었던 방지일 목사는 1911년 5월 21일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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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시 명문이었던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다시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37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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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4년동안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전도사로서 길선주 원로목사와 함께 동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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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목사는 안수를 받은 직후 중국으로 건너가 산동성 등지에서 20년 넘게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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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후 그는 1979년까지 영등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으며 71년부터 72년까지는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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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지일 목사의 생활신조는 "닳아 없어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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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세의 나이로 소천한 방지일 목사의 이 한마디는 정말이지 천금 같은 무게로 우리의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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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그가 소천한지 5주기,
다시 한 번 방지일 목사를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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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화요일 #기독교명언
페북 교회친구다모여 옮겨 씀



개구리 죽음에 빗댄 민족의 참담함… 성경책 들고 맞서다

경인일보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8-22 제15면

일본서 성경 중심 무교회주의 들여와 연구회 조직 '성서조선' 발행
158호 弔蛙 통해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 말살정책 극복의지 표현
해방 후 장봉도 푸른학원 이어받아 빈민구호·교육사업에도 힘써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 초반 서울에서 발행된 한 기독교 잡지 첫 장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권두언이 실렸다.

권두언의 제목은 개구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조와(弔蛙)'.

1942년 3월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기독교 신앙 잡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 158호에 겨울잠을 자다 얼어 죽은 개구리를 빗대 민족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한 글이 실렸다.

일본은 잡지 발행에 가담한 인물과 독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른바 성서조선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훗날 인천 장봉도에서 빈민구제 활동과 교육 사업에 헌신했던 독립운동가 송두용(1904~1986) 선생이 있었다.

송두용은 1904년 7월 31일 충청남도 대덕군(지금의 대전시 대덕구)에서 부농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 때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에 입양됐다가 서울로 유학해 제동공립보통학교와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8세 나이에 일본 유학길에 올랐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해 귀국했다. 그리고 21살 때 다시 일본 도쿄농업대학 예과로 진학했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인생이 바뀌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제도권 아래 있는 교회 제도를 비판하며 성서와 신앙만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무교회주의'가 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인 수를 늘리고 헌금 걷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기성 교단을 부정했다.

 
성서조선 158호에 일제 저항정신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권두언 '조와(弔蛙)'를 실었다가 옥고를 치른 무교회주의 6인방.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유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송두용은 일본에서 무교회주의를 설파하던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에 감명을 얻어 한국인 유학생인 김교신, 함석헌,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과 함께 '성서연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7년 무교회주의 신앙을 기반으로 한 잡지 '성서조선'을 처음 발행했다. 송두용은 성서조선 6인방 중 가장 나이가 어린 23세였다.

1930년 귀국한 송두용은 부천군 오류동(지금의 구로구)을 기반으로 성서집회를 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송두용 등 6인방은 성서조선 발간과 함께 서울, 인천, 부천 등지를 다니며 강연을 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부터 율목동의 인천모임을 만들어 무교회주의를 알리고 주변에 성서조선을 전달했다.

김교신이 1927년 7월에 쓴 성서조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 신자보다도 조선혼을 가진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에 나뭇군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는 내용이다.

민족의식을 가진 기독교인들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하는 등 종교 운동을 바탕으로 한 항일의식이 확산하자 일제는 기독교를 철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결국 1942년 3월 송두용과 김교신 등이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은 '조와'가 일제의 감시망에 잡혔다.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이 바위틈의 빙괴(永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 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 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는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마리 기여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은 혹독한 추위가 와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죽어 나가더라도 한두 마리는 살아남듯이 일제가 아무리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더라도 끝내 살아남는 한국인이 있다는 얘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일제는 송두용과 김교신 등 6인방과 주요 독자 12명을 치안유지법 혐의로 체포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가뒀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10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고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성서조선도 '조와'가 실린 통권 158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송두용 등 무교회주의 신앙인 6명이 발행한 잡지 '성서조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공


송두용과 동시대에 무교회주의 활동을 했던 노평구는 당시 일제가 무력 투쟁이나 드러내놓고 하는 독립운동보다는 이 같은 종교·문화 운동을 더 두려워했다고 회상했다.

 

노평구는 송두용이 잡지에 쓴 글을 모아 총 6권 분량의 송두용신앙문집을 펴내기도 했다. 

 

성서조선사건 당시 일본 경찰은 "너희 놈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잡은 조선놈들 가운데서 가장 악질의 부류들이다. 결사니 조국이니 해가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놈들은 오히려 좋다. 그러나 너희들은 종교의 허울을 쓰고 조선민족의 정신을 깊이 심어서 백년 후에라도 아니 오백년 후에라도 독립이 될 수 있게 할 터전을 마련해 두려는 고약한 놈들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노평구는 밝혔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개인의 신앙생활과 함께 구호활동과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30년 오류동에서 오류학원을 설립해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던 송두용은 1969년부터 장봉도에서 지인의 제안을 받아 '푸른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을 맡았다. 

 

건강 문제로 요양차 장봉도에 들렀다가 1967년 푸른학원을 설립한 무교회 신앙인 노연태로부터 푸른학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그는 '장봉도 할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었다.

 
1930년 오류학원을 설립할 당시의 송두용.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당시 장봉도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어 육지의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들은 바다에 나가 굴이나 조개를 따거나 선주 밑에서 새우 선별작업을 하는 고된 일을 하면서 자랐다. 

 

강화도와 영종도, 신·시·모도, 장봉도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노연태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송두용은 '정직'을 교훈으로 내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박정수 등 인천에서 함께 신앙 모임을 갖던 사람들도 푸른학원에서 교사 활동을 했다. 

 

푸른학원은 1974년 정식으로 중등학교 인가를 받아 푸른고등공민학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육지로의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푸른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학생들이 급격히 감소했다.

송두용의 건강이 악화되고, 학생 수가 자연스럽게 줄면서 1982년 푸른학원은 결국 문을 닫고 만다. 인천섬연구총서 '장봉도'편을 보면 1982년 장봉도 초등학교 졸업생이 36명이었는데, 푸른학원으로 진학하겠다는 학생은 겨우 4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0년 넘게 장봉도의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송두용은 1986년 4월 10일 서울 구로구 자택에서 눈을 감았다. 따르던 제자들과 무교회주의 신앙인들은 송두용의 추모집을 발간하고, 그가 쓴 글을 모아 문집을 내기도 했다.

송두용은 무교회주의 종교인이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였다. 2010년 송두용은 성서조선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사실이 인정돼 독립유공자 서훈(건국포장)을 받았다. 국가보훈처는 그를 '인천' 출신으로 분류하고 있다.

송두용은 1958년 3월 잡지 '성서인생' 33호에 쓴 '진정한 3·1 정신'이라는 글을 통해 60년 뒤를 내다보기라도 하듯 현세대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을 남겼다.

 
1958년 3월 송두용이 3·1정신에 대한 글을 썼던 잡지 성서인생. /송두용신앙문집간행회 제공


그는 3·1 정신은 말이나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며 산 생명이라고 했다. 

 

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각종 기념식 행사에만 치중해 진정한 독립의 의미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을 일찍이 우려했던 거다. 

 

그는 "3·1 운동은 한 개인, 한 정당, 또는 한 단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인도 근로대중도, 부호도 빈자도, 남녀노유의 구별 없이 도시와 촌락의 차이가 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그는 특히 3·1 운동의 정신은 국민 개인이 실력을 양성해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일본 아베 정부의 무역보복 조치로 반일 감정이 확산하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극일(克日)'의지를 불태우는 현 시국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송두용은 "우리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무서워하거나 일본의 침략정신을 겁낼 것이 없다. 일본을 이기고 소련을 물리치려면 오직 실력밖에 없는 것이다. 

 

모든 허위와 외식을 버리고 허영과 기만을 떠나서 다만 진실 일로로 매진하는 수밖에 없다. 3·1 정신은 행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실천궁행으로 사는 것이며 이룰 것이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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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김민재 기자 발행일 2019-08-22 제1면

옥고도 치러… 2010년 유공자 인정
해방이후 남북통일 염원 밝히기도

 

인천 장봉도에서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육사업에 헌신했던 기독교 신앙인 송두용(1904~1986) 선생.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라는 다소 생소한 신념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빈민구제 활동가로 잘 알려진 그는 독립운동 행적과 사상과 관련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편이다.

송두용은 뜻을 함께한 신앙인들과 함께 만든 기독교 잡지 '성서조선'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했다.

"매서운 추위에도 살아남는 개구리는 있다"는 내용의 성서조선 158호(1942년 3월)의 권두언은 칼끝과 총부리로 우리 민족을 겨누고 말살하려 했던 일제에 일침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송두용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송두용은 이 사건에 대해 "일본 경찰은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모조리 검거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치성은 전혀 없고 다만 기독자로서 양심생활을 한 것뿐"이라고 했다.

그는 스스로 정치적 행동과 거리가 먼 신앙 그 자체를 위한 활동(신앙만의 신앙)이었다고 밝혔지만, 순수한 신앙심이 결국 민족의 해방과 평화에 대한 갈망을 불러왔다.

 

정부는 2010년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송두용은 해방 이후에도 신앙과 관련한 활발한 저술활동을 통해 많은 글을 남겼다. 3·1 운동 정신은 거창한 행사가 아닌 실력 양성으로 일본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 이후 송두용은 남북을 비롯한 전 세계의 평화를 원했다.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송두용은 해방 22주년을 맞았던 1967년 8월 "이제는 각각 남의 나라처럼 또는 피차 독립국가인 양 당연한 것 같이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듯이 체념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만의 말이다. 어서 남북이 합쳐야 한다. 하루속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한다"고 했다.

/김민재기자 k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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