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7‭-‬13 하나님성전의기둥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021030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전재용 2016년 출근길 체포 2년6월복역 옥중찬송 듣고 신학결심 부인이상아반대 


처지와 형편 무관 주를 따르는 신앙

세상은 외면해도 주님이 인정하신 빌라델비아 교회

적은 능력으로 믿음을지킨교회

내사랑의증거를보여주리라

시험의때를면하게하겠다

붙잡고있으라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


성전기둥되게하리니 다시나가지아니하리라 내이름을기록하리라


이기는 자는


다시나가지아니하리라

대지진후 재건동안 교외로 나가지내야 여진으로 항상불안해했던 빌라델비아


기둥에새겨지는세이름

1.하나님의 이름과

2.새 예루살렘의 하늘여서내려오는

3.예수님새이름 

완전한인침

하늘시민권부여


왕상7.21솔로몬성전앞 두기둥

야긴 하나님이세운다

보아스 하나님께능력이있다


출애굽 가나안 인도 구름과불기둥

갈2.9 교회 일꾼기둥같이여기는 세우다 변하지않는 충성 예수동생 야고보서저자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


적은 능력으로 믿음지킨 빌라델비아에 세상것아닌 하나님 나라기둥되는축복내리신 하나님 


예배 service 하나님 섬기는 봉사가 예배의 완성

이사야60 일어나빛을발하라 자자손손 나의성전봉사자가되리라


기둥은

1.곧아야

상처가 비뚤어지게 한다

2.위를향해선다

땅에살지만땅에마음두지말아야

절제가 필수

3.자기자리를지킨다

4.강하고튼튼해야

소아시아7교회 무너진유적지에남은기둥들

5.연결되어있다 

하나가된다


초대교회 헬라파유대인들이 자기네 과부들이 구제에 빠져 히브리파 원망 헬.공기스모스 작은소리로소근소근

대책으로 교회일꾼세워 하나가되게 하다


6.눈에보이지않는다

번개탄 자기먼저불타오르고연탄아래로들어가연탄을불타오르게하는

7.교회를받치고기댈수있는 의지처가된다

요한계시록 3:7‭-‬13 면류관을빼앗기지말라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021022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 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말씀을 붙잡고 배반하지 않은 교회

내가너를사랑하는줄을알게하리라 


빌라델비아교회에 하시는 당부

내가속히오리니

1.가진것을 굳게잡으라

2.빼앗지못하게하라

3.주의손을굳게잡으라


신앙은 영적싸움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예배를 기도를 헌신을 빼앗긴 교회


하늘상급과연관되어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8 KRV


소련 12신자 얼음물속 예수부인하라 물밖에는 불과 음식 견디다못해 물속에서나온 한사람 지키던병사가본환상 12천사가면류관들고내려오다가 한천사가울며다시올라가 병사 옷을벗고 얼음물에들어가며 저가버린예수를내가대신믿겠다


영적목표분명히갖고살라

하나님나라에대한거룩한꿈


주의손을굳게잡으라

주께서나를붙잡고계심을깨달으라


인도초기선교사 스코트목사 호전적종족만나 창을겨누다 바이올린켜며 "주예수이름높이어다찬양하여라~"

3절끝나자 엎드린 종족 "당신이노래하는 만유의주가 누구신지 우리에게가르쳐주시오"

평양에 기생들이 둘이서 의논해서 ‘넌 길선주 목사 가서 넘어뜨려라,’ ‘넌 남산제 교회 감리교 목사 가서 넘어뜨려라’ 하고 둘이 계획을 했답니다. 그 당시, 길선주 목사는 한국에서 제일가는 유명한 목사님이었습니다. 남산제 교회 감리교도 상당히 큽니다. 감리교 가운데 남산제 교회도 가장 컸습니다. 그 교회에 유명한 목사 있었을 것 아닙니까? 기생들이 계획적으로 넘어뜨리려고 작정을 하고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목사는 교회 나오면 다 좋아하지 않습니까? 나와서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합니다. 열심히 나와서 선물도 잘 사다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기생 공부한 것이 있어서 기도도 잘했다고 합니다. 심방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연보도 많이 하고 하니까 목사들이 인정을 했습니다. 또 세례도 받고 또, 세례문답도 얼마나 잘했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제 기생들이 목사를 넘어뜨려야겠는데, 갑자기 밤중에 급한 병이 들었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길선주 목사에게 전화가 왔답니다. 충성하는 교인인데 밤중에 병이 났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는데 안 갈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보니 이것이 계획적인 병이랍니다. 들어가니까 계획적으로 붙들고 동침하자고 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거기서 길선주 목사가 ‘길선주 죽는다! 길선주 죽는다!’ 하고 소리를 계속 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겁이 나가지고 길선주 목사를 놔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길선주 목사는 그 계획에 안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남산제 교회 목사는 넘어갔습니다. 기생의 계획, 마귀의 계획인데, 여기 헤로디아 같은 여자입니다. 넘어가서 그 여자와 동침하고 그 다음에는 탄로가 나서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후에, 해먹을 것이 없으니까 평양 모란봉 올라가는 길가에서 당책 보아 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당책은 길가에 책 펼쳐놓고 사주팔자 보는 것입니다. 당책 봐주고 살았다고 합니다. 목사가 가서 이렇게 당책 봐주고 먹고 살았다니,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마귀의 계획에 넘어가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병규목사 사경회 마태복음 14장 강해 도중에

텀블러에서 건진 교회사진들 http://churchphoto.tumblr.com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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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3:7‭-‬8 작은능력에실망하지말라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910214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43.7% 교회발로 인식 실제 대면예배로인한 감염은11%


빌라델비아 작은에덴 승리 포도주생산지 수호신 술의신 디오니소스 서머나 동북아지역으로도로발달 로마가 교역로롱활용 AD17년 사대지역 지진 몰락 황제 티베리우스 재건 중심지는 쇠락

열악해진 환경속 빌라델비아 교회사람들 유대인들의 핍박


칭찬받은두교회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작은능력으로도

1.내말을지키며

2.내이름을지켰다


순종한다가 손해를보더라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


배신 배반 배교

나머지교회다섯에 이른 비난 


감동하는이유는 그들의 형편을 알기때문


작은능력 물매돌들고 문제향해달려나간 다윗


눅19 삭개오 키가작고 사람이많아


두나마이 할수없어 두나미스

우크 못해


4절 

1.앞으로

2.달려가

3.올라가

모든문제를 예수를만나 단번에푼다


예수께서 쳐다보시고 우러러보시고 아나블래포

오병이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작은능력때문에 실패하는게 아니라 실망하고포기하기때문에실패한다 전능자 의뢰하지않기에 실패한다


민13.3 스스로보기에도 메뚜기같으니 저들이 보기에도 그러하리라 

남과비교하매 스스로 위축된다

하나님조차아무것도할수없다

갈렙에게돌을던져

민14.6 기뻐하시면 주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말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저들은 우리밥이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저들과달라

한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못하다


하나님의사람은 생각하고보고말하는게다르다


눅12.3 적은무리여 무서워말라 
산상수훈뒤 초라한 백성들에게 

요한계시록 3:7‭-‬8 다윗의열쇠를가지신예수님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1020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교회

두형제의사랑으로세운도시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칭찬받은두교회 


자기소개

1.거룩하고 / 구별된

성도 구별된사람들

2.진실하사 / 약속지키는

3.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계1.18 살아있는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음부열쇠가지신

다윗의열쇠

사22.20 엘리야김 이스라엘왕위에 오를때 다윗의집의열쇠를그어깨에두리니 열면닫을자없고닫으면열자없는


1.메시야성

2.그리스도를통하지않고는하나님나라에들어갈자없다


열면닫을자없고닫으면열자없는 절대주권


질병

1.자연재해.본인실수 / 의사

2.마귀시험 / 어둠의영을쫒아야만

3.하나님이허락하신병 


빌라델비아 축복

1.열린문을두었다

복음 전도 

유대인들로인해고통받은교회에 찾아와 무릎 꿇은 유대사람들

외적부르심(전도선교)과 내적부르심(성령감동회개)


2.열쇠를가지신예수님 

잠긴것을여는유일한해결책


3.다윗의열쇠를우리에게

마16 천국열쇠를너에게

믿음과은혜로 막힌것들을 열어나간다윗

잠그기도하신다

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제목: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끝)

[출처: 개혁신앙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4914/20180113/%ED%95%9C%EA%B5%AD%EA%B5%90%ED%9A%8C-%EC%83%88%EB%B2%BD%EA%B8%B0%EB%8F%84%ED%9A%8C-%EC%9C%A0%EB%9E%98%EB%8A%94-%EC%96%B4%EB%96%BB%EA%B2%8C-%EC%8B%9C%EC%9E%91%EB%90%90%EB%82%98.htm

사무엘상 17.31-49 삶의우선을바꿔야승리합니다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10131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부른지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블레셋 사람이 점점 행하여 다윗에게로 나아오는데 방패 든 자가 앞섰더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사무엘상 17:31‭-‬49 KRV

https://bible.com/bible/88/1sa.17.31-49.KRV


다윗의 승리결과

1.감동있는결과

2.다른사람에게 영향을끼친승리

3.자기미래만드는승리

왕이되는길로들어선다윗

4.하나님이 영광되는승리

5원수를잠잠케하는승리


골리앗은지나가는것이아닌싸워이겨야하는것

내가 골리앗 교만 열등감 분노


작은승리가 모여 큰승리를 이룬다

목동이 치를 싸움들이 물매기술을 익히게


시험을 이겨야 한다

삼상17.28 양들은 어쩌고 네가 전쟁구경하러 왔다

가까운이들의 말이 시험

다윗은 이를 무시하는것으로 시험이긴다

내싸움의 진짜대상이 누군지 안다

엡 우리싸움은혈과육아니요

시험을 이겨야하는 이유는 삶을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이기려면

1.싸움대상을 분명히하라

2.멈추지말라 기도를예배를섬김을

멈추지않으면 주님약속대로 피할길이나온다

3.세상갑옷으로는승리하지못한다

4.나만의물매돌이있어야한다

내가 길들인 습관 도전 인격 인품

물매돌없이갑옷만입으려는가


다윗의물매돌

믿음의생각믿음의말믿음의행동

37 낙담하지말라 나를건져내시리라 이무리에게알게하시리라 

말이바뀌면 삶이바뀐다

48 빨리 달리고


물매를 명중시킨것

다윗의훈련

하나님이 하신것

구원은100%하나님이 하신것이나 승리를위해서는 내가할일과하나님해주실일이있다


하나님을사랑하는마음에서 그이름을더럽히지않으려는열망이 있어야

예배 선언에 이어 찬송하고...
그때도 몰랐다.
대표기도에서 "저 장로님 지난 주에도 기도하셨던것 같은데..."
이상해서 홈페이지를 다시 보니 아뿔사 지난주 예배 영상을 보고 있었다.
황급히 라이브영상을 클릭한다.
하나님 어떻게 받으셨을까?

창세기 26:13‭-‬33 삶의우선을바꿔야승리합니다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10124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창세기 26:12‭-‬22 KRV

https://bible.com/bible/88/gen.26.12-22.KRV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KRV

https://bible.com/bible/88/gen.26.23-33.KRV


보람있고 가치있고 의미있는 생

멋있고 행복했고 아름다운 생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두느냐?


마침내 거부가 되어

과정이 있었다

씨를 뿌리매 백 배나 거두고

창대하고 왕성해지다 (계속걷다)


거부되기까지는 개인의 삶

이후는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에서 물질을 얻는 일 물질과의 갈등

세번이나 우물을 뺏기다

온유가 무기다

다투지 않고

훈련 되어지는 것


마5.5 온유한자 땅을 기업으로

8복 가운데 유일하게 이 땅에서 얻는 복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

마11.29 예수 자기소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물러가고 물러간 곳이 여호와께로 가까이 가는 길이되다

브엘세바로 가게 되다


25절

하나님만나축복받은이삭

장막치는일보다 우물파는일보다

예배먼저

마6.33 먼저그의나라와의를구하라 그리하면이모든것을더하시리라


왕과 군대장관이 찾아오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보았다

29절

나는하나님께복을받은자라

이방인에게 하나님을 보여준 이삭


드디어우리 우물에서 물을 얻었나이다 


십일조는 신앙고백 

주일,십일조,주의종은 주의것이니 손대지말라

어떤 이는 예수께서 새벽기도회를 맨 처음 시작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예수께서 새벽에 기도하신 이유는 식사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쁘셔서 새벽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던 것이다. 새벽기도회에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여기에 옥성득 교수의 한국교회 새벽기도회에 강의를 들어본다.


옥성득 교수(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석좌 부교수, 한국기독교)는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와 국사학과를 졸업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와 보스턴대학교에서 기독교 역사를 공부했다. 2002년부터 UCLA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종교사를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는 '한반도 대부흥' 등이 있다.

 

제목: 한국교회에 토착화된 새벽 기도의 유래와 본질

새벽 기도회는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의례다. 지금 50대 중반을 넘은 분들은 젊었을 때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어나 교회에 나간 아름다운 추억들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무교(여성의 새벽 치성)나 불교(남녀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되었다는 통설을 비판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새벽기도가 남자들의 선도(仙道) 수련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고 새벽기도의 기독교화 과정이 어땠는지도 서술할 생각이다. 유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초기 새벽 기도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는 초월성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한 역사성이 결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유래와 시작

(1) 한국교회 새벽기도가 불교나 무교에서 유래되었는가?

여러 글과 책에 초기 한국교회의 새벽기도가 불교 사찰 승려들의 새벽 예불에서 유래했다고 한 다. 또 민간 무속의 여성들이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샛별(계명성)이나 칠성신에게 빌던 성수(星宿) 신앙, 고목 앞에서 빌던 신목(神木) 신앙 혹은 조왕신 (부엌 음식 신)에게 빌던 데서 왔다고 서술하기도 한다. 새벽 미명은 신령한 존재와 영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여인들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정화수를 떠놓고 간절하게 빌고 치성을 드렸다. 그 기복적 가족 기도가 그대로 기독교로 넘어와서 새벽마다 교회에서 가족의 건강과 사업의 번창을 위해서 기도하는 '무교적 기독교인'이 많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필자는 초대 한국교회에 관한 기록에서 새벽기도가 그런 연관성을 가졌다고 언급한 자료를 아직 본 적이 없다. 1970년대 이후에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을 비판하는 글들이 피상적으로 그 연결성을 유추하고 짐작한 것뿐이다. 그러한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나 1차 사료(史料)를 가지고 쓴 것은 아니다.

(2) 도시 파루와 사찰 새벽종이 새벽기도 종의 기원인가?

 

대개 초대 한국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4시 30분이나 5시에 드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새벽 4시 30분이라는 시간은 도성(都城)의 새벽 파루(罷漏)와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 큰 도시는 4대 문과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세종 때 만든 자격루(自擊漏, 물시계)로 정확한 시간을 알았다. 따라서 같은 시각에 종을 쳐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했다. 새벽 4시에는 파루(罷漏)로 33번 종을 쳐서 성문을 열고 통행을 시작했다. 밤 10시에는 인정(人定, 인경)으로 28번 타종하여 우주의 일월성신 28개 별자리를 쉬게 하고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를 실시했다. 파루 때 했던 33번 타종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에 있는 33개의 하늘을 깨우친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찰처럼 새벽 3시나 5시가 아니라 도성에서 4시에 파루를 친 것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노동을 해야 했던 농경시대의 산물이었다. 수천 년 간 그때 일어나 일하던 인간의 생체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새벽 기도회를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것은 4시에 통행이 시작되던 습관을 따라 한 것이다. 도성의 종각에서 타종하지 않아도 4시에 일어나 예배당에 오면 4시 30분이 되었고 먼 곳에서 오는 자들이 많으면 5시에 모여 기도할 수 있었다. 즉 파루와 연관한 하루 일상의 시작 시간에 일어나 교회로 와서 새벽 기도회로 모였다.

그러나 절에서는 하루 다섯 번 범종을 울리고 예불을 드렸다. 초경(밤 8시), 이경(밤 10시), 삼경(자정, 108번), 사경(새벽 3시, 5번), 오경(새벽 5시, 28번 타종으로 28세계가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 등이었다. 사찰의 상가 공동체는 성(城) 안에 있지 않고 산속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예불, 다시 새벽 5시에 운판(나무판)을 치고 목어(목탁)를 울리고, 법고(북)를 울린 다음에 범종(梵鍾)을 28번치고 승려들이 함께 모여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중생들이 깨달음을 얻어 해탈하기를 구했다.

사찰의 그것은 일과에 따라 기도했던 중세 유럽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생체리듬에 반하는 시간에 일어나 묵상하고 잠과 욕망을 끊는 행위로 드린 염불이었다. 즉 사찰의 새벽종은 세속 도시의 하루를 시작하는 파루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종으로 속세를 떠난 수도승의 정좌와 묵상과 예불을 위한 시공간이었다. 그 피안의 공간에서 매일 자정과 새벽 3시에도 일어나 육체성을 거부하고 전문 종교인 집단의 집회를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벽기도와 달랐고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적었다.

정리하면 새벽기도는 불교 사찰의 범종이나 전문 종교인들이 드린 피안적 예불과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세속 도성의 새벽 파루와 함께했던 하루 일상의 시작과 연관된다. 그와 같은 세속성 안에서 거룩성을 회복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했던 신자들이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던 데서 창출되었다. 긴장감이 있는 성속(聖俗)의 경계에서 밤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은 틈새 시간에 새롭게 넣은 기도시간이었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무교적 민속신앙이 그 유래인가?

1905년 초 송도(개성)서 열린 남감리회 부인사경회 때 캐롤(A. Carroll)이 경험한 내용을 보자.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에 있던 여자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다음 날은 새로 몇 사람이 더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들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이덕주 교수는 이 글을 해석하면서 과거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조왕신(竈王神)에게 빌던 여자들의 습관이 사경회 기간 중에 새벽 기도회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보았다.(이덕주, '한국 토착교회 형성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0, 348~350쪽) 그런데 이 자료를 가지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엌에서 조왕신에게 노래로 찬양을 드렸던가? 아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치성(致誠)을 드릴 때 옆 사람들과 한 시간 반 동안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니다. 자료에 나오는 일시적인 새벽 기도회와 무속의 조왕신이나 치성사이에는 시공간, 성격, 의례 모든 면에서 연속성을 찾기 어렵다.

2. 한국교회 새벽기도의 시작

새벽기도의 유래에 대해서는 필자가 발표한 논문이 있다. 자세한 논의는 '평양 대부흥과 길선주 영성의 도교적 영향'(한국기독교와 역사, 25호, 2006년 9월, 7~35쪽)을 보라.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선도(仙道)의 수행자였던 평양의 길선주와 그의 동료들이 청일전쟁 후에 개종하고 평소 수행(修行)을 하던 새벽기도, 통성기도, 철야기도 등을 1905년 전후 사경회(査經會)에 도입했으며, 1909년 전후에 교회 프로그램인 기도회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새벽기도가 길선주와 그 친구들의 도교(道敎) 수행에서 유래했다는 나의 이 주장에 대해 아직 반론을 들은 적이 없다.

필자는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길선주가 중심이 되어 선도(仙道)에서 기독교로 토착화한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1910년 전후부터 한국교회에 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사적인 소원을 빌었던 도교(道敎)의 기도와 비교하면 개신교의 기도는 민족적 위기에 교회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공공성(公共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또한 집단적인 '새벽기도'는 장로교회 사경회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 1898년 2월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으며, 황해도의 다른 사경회(1901년 2월)에서도 교인들이 새벽 기도회를 시작한 것을 처음 소개했다. 이와 같이 사경회(査經會) 때 소규모 일시적으로 모이던 새벽 기도회가 1905년 평양 도(道) 사경회 때 정식 프로그램으로 채택되었으며 1909년에 개교회의 프로그램으로 전환되었다고 정리했다.

3. 1890~1905년 사경회와 새벽기도회

선교사들은 1892년 10명 정도의 한국인 남자 지도자들과 조사를 모아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성경, 교리, 전도법, 설교법, 교회 치리법 등을 가르치는 사경회(査經會)를 조직했다. 1891년 채택한 네비어스의 방법에 따라 본토인 목회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1892년 11월 28일부터 12월 24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첫 신학반에 참석한 백홍준, 한석진 외 참석자들이 새벽에 일어나 자발적인 기도회로 모였다. 이후 이 조사 사경회(査經會)에서 새벽에 일어나 찬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이 계속되었다. 조사 사경회의 새벽 기도회가 황해도에서 일반 사경회 새벽 기도회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말테의 논문 '한국 개신교회 새벽기도의 초기에 대한 연구'(신학과 실천 31호, 2012년 5월, 183~225쪽)에는 1892년 조사 사경회(査經會) 전 백홍준, 마포삼열, 한석진 등의 새벽기도 사례를 소개한 후 여러 사경회에서 행해진 새벽 기도(회) 사례를 잘 정리해 놓았다. 후자는 필자가 소개한 황해도 강진교회 사경회 새벽기도(1898년 2월)와 다른 황해도 사경회 새벽기도(1901년 2월)에 이어 평북 초산(1901), 원산(1903), 평양(1904), 서울 이화학당(1904), 송도(1905) 등의 사경회(査經會)에서 이루어진 새벽기도 사례들을 정리했다.

그리고 이어서 필자가 정리한 1909년 길선주와 박치록 장로가 주도한 평양 장대현교회의 새벽 기도회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이 가운데 1909년 새벽 기도회만 교회에서 광고한 후 일반 신도들이 모인 기도회였고 나머지는 사경회 때 이루어진 일주일 정도의 한시적인 기도회였다.

이말테는 새벽 기도를 남성들이 시작한 것에 주목했다. 여성들의 무속적 새벽 치성에서 새벽 기도가 유래했다는 통설을 비판했다. 또한 1893년 평양 지부를 개척하던 마페트(S. A. Moffett) 선교사와 조사 한석진 가정의 새벽기도를 근거로 마페트가 새벽기도 창시에 큰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페트가 새벽기도를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더 검토되어야 한다. 만일 그가 새벽기도에 관심이 많았다면 1895년 이후 가정에서 새벽기도를 꾸준히 드리거나 평양 널다리교회 혹은 장대현교회가 준공된 1900년에 새벽 기도회를 창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페트가 남긴 글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또한 개인적으로 잠시 드린 새벽기도를 교회의 '새벽 기도회'의 유래로 보기는 어렵다.

(1) 길선주의 첫 장대현교회 새벽 기도회는 1906년 아닌 1909년

많은 책이나 온라인 블로그에 보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글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새벽기도는 1906년 가을 길선주 장로의 주도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였다. 이 새벽 기도회는 1907년 평양에서 촉발된 한국 기독교 부흥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길선주 장로는 국가가 어려운 상황(당시 일제강점기)에 놓여 있는 것을 걱정하여 새벽에 교회에 나가 기도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같이 기도하기 시작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300~500명에 이르는 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 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7년 부흥의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세 가지 주장은 오류다. 1906년으로 알려진 것은 김인서가 1930년대 '신앙생활'에 길선주 소전을 쓰면서 그렇게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 또한 아직 한국이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가 되기 이전이었다.

(2) 새벽 기도회가 정착한 것은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

1907년 대(大) 부흥 이후 1910년대에 새벽 기도회가 한국교회에 널리 시행되고 매일 새벽에 모인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런 기록은 없다. 이덕주 교수가 지적한 대로 1914년에 시작한 강화도 마리산 부흥회 때나 여러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 모두 일주일을 사경회(査經會)와 부흥회 때 드린 것이 전부 다이다. 그러므로 아직 개 교회 차원에서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또 교회에 홀로 새벽에 나가 30일이나 100일 개인 기도를 드린 예들이나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신석구 목사의 개인 새벽기도 등에서 보듯이 1919년 이전에는 매일 새벽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가 없었다.

1920년대 후반에 정착하는 새벽 기도회 자료는 더 수집해서 정리해야 할 주제다. 이때 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하루하루가 종말인 가난한 교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3) 새벽 시간의 기독교화로 파루를 대신한 교회의 새벽 종소리

1910년대 사경회 때의 새벽 기도회는 도시의 새벽 시간을 기독교화하기 시작했다. 1910년 전후 일제 총독부는 문명의 발전과 도로 확장과 신작로 개설이라는 명목으로 서울과 다른 도시들의 성벽(城壁)을 다 허물었다. 사대문(四大門)을 지키는 일본 순경의 호각 소리와 칼 소리가 새벽 소리가 되었다. 성벽이 없는 경성(京城)에 보신각(普信閣)은 무용지물이라 폐쇄(閉鎖)되었다. 서울은 영혼(靈魂)의 종소리를 잃어버렸다. 성(城)이 없는 경성은 보신각 종소리(聲)가 사라진 경성이었고 종소리 없는 도시는 성스러움(聖)이 사라진 식민지의 경성이었다.

이러한 때에 도시와 시민들에게 다시 종소리를 준 것이 교회와 성당이었다. 명동성당에서는 아침 6시, 정오 12시, 저녁 6시에 하루 3번 종을 쳤다. 주일마다 각 도시 교회와 그리고 점차 교회마다 사경회를 다른 기간에 하면서 새벽에 종을 쳤다. 여러 교회에서 퍼져 나간 종소리는 다시 새벽시간을 구별하고 도시의 새벽을 살리는 영성(靈聲)이 되었다. 도시의 혼이 살아나는 소리였다. 성수주일이 일주일을 시작하는 안식일의 성화였다면 새벽기도는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의 성화였다.

3. 한국교회 새벽기도는 성도들이 확보한 시공간

성(城) 안에 사는 시민들은 새벽 4시에 성문이 열리면 일어나던 습관을 따라 성(城)의 종소리가 사라진 후에도 대개 4시에 거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교회에 도착하는 4시 30분이나 5시에 새벽 기도회로 모이고 이어 일하러 가면 시간이 적절했다. 따라서 4시 30분이나 5시에 시작한 교회의 새벽 기도회는 격리된 산속에 있는 사찰에서 새벽 3시나 5시에 승려들끼리 모여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불을 드리는 것과 달랐다.

세속 도시 속에서 거룩성을 느끼고 영성을 유지하려는 노동자와 주부들의 기도회였다. 그 예배는 곧 다가올 일상의 무거움 앞에 하늘의 도움을 구하는 시간이었다. 어두움에서 빛으로 넘어가는 하루의 문지방과 같은 경계선의 시간의 사이(時間), 그래서 긴장이 팽팽한 틈새 시간, 변혁을 품고 있는 전이의 시공간에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모여 하나님을 구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생존할 수 있는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밤낮 쉼 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이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잠자는 하늘을 깨우거나 중생을 계몽하려는 사찰의 예불과 달랐으며 여성들이 홀로 칠성신(七星神)에게 비는 민간신앙의 치성과 달랐다. 전자에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 없었고 후자에는 남녀가 함께 하는 공동체성이 없었다. 양자 모두 공적(公的) 기도가 없었다. 새벽 기도회가 한국 개신교를 상징하는 의례가 된 것은 피안(彼岸)의 기도나 사적 기복인 기도와 달리 세속 안에서 일반 교인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공적(公的)인 기도회로 기독교화 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세상을 구한다. 거룩한 영혼의 종소리가 사라진 한국교회에 다시 종을 치는 종지기들이 필요하다. 남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 새벽마다 종을 치던 사찰 집사님의 매일의 헌신이 있던 교회 어릴 때 들었던 교회의 그 종소리가 그립다. 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새벽 미명에 무릎 꿇고 자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어머니들의 눈물로 지금 청년과 장년들이 그나마 살고 교회가 살아 있다. 진정한 새벽기도가 세상을 구한다. 한 손에는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하는 수직성을 담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 성자로서 민족을 위해 도고하는 수평성을 담아 두 손을 모아 함께 드리는 새벽 기도로 교회가 산다.(끝)

[출처: 개혁신앙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

http://kr.christianitydaily.com/articles/94914/20180113/%ED%95%9C%EA%B5%AD%EA%B5%90%ED%9A%8C-%EC%83%88%EB%B2%BD%EA%B8%B0%EB%8F%84%ED%9A%8C-%EC%9C%A0%EB%9E%98%EB%8A%94-%EC%96%B4%EB%96%BB%EA%B2%8C-%EC%8B%9C%EC%9E%91%EB%90%90%EB%82%98.htm

사무엘상 24:16‭-‬22 승리의비결이무엇인줄아는가 전승환목사 안양서부교회 210117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희락 로14.17성령안의 희락과 평화

쾌락 혼자만의 기쁨 상대 희생위에 만들어지는것

애덴동산범죄로 관계가 깨지다 인간과하나님의관계깨진다 죽음 예수십자가로 회복


하나님 다른사람 자신과의 관계 회복

출생부터 이어지는 관계


1.관계기술 대화의기술

2.관계회복력

3.화평케하는능력 팔복 하나님의자녀 초대교회일꾼주요요구능력 화평케하는능력 


만남 하나님축복의씨앗 관계로 이루어진


독의되는 복이되는 관계

힘이되는 짐이되는 관계

약이되는 악이되는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나 스스로를 다스리는 능력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KRV

https://bible.com/bible/88/pro.16.32.KRV


엔게디 광야 포도주 굴이 많은 곳 들염소 사울과 3천명


자기를 이긴 다윗이 진정한 승리자

자기보다 더강한골리잇을이김보다값진승리

롬12.18 화목하라 선으로악을이기라


자기를 이기는방법

1.올바른 습관 라틴어 하비투스 수도사옷 매일같은옷을입고벗는 똑같은일을반복하는 습관 분노와짜증도 습관

자기를잘길들여라


2.긍정적 태도 

관계의 황금사다리 안녕하세요 뒤에 붙이는 상대를 칭찬하는 한마디


관계망치는법

1.도덕적기준으로판단 

자기.사회기준이아니다


있는그대로 받아들여라

상대속 하나님형상보려하라

나마스테 힌두 당신안에있는신을존중한다


다윗 내가왕을아껴 불쌍히여겨 


건강하고좋은감정을유지하라


릭워렌 새들백 배우자고를때 건강한감정을가진사람

1.친절하고 관대한

2.이기적이지 않은

3.중독에 빠지지않는

4.마음의고통과 힘든걸 숨기지않는

5.분노감정 잘다스리는

은혜가 있고 성령이 충만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