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기독교 - 수원성결교회

‘1928년, 세워진 초창기 수원성결교회는 일본사람들이 신사참배 하던 절이었다. 수원 신풍리에 16평 셋집을 얻고 교회가 창립될 당시 개척에 참여한 집사 4명과 이성복 전도사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길거리 전도를 나갔다. 역전과 장터를 비롯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이성봉 전도사가 이끄는 전도대가 코넷이라는 나팔을 신나게 불고 다른 이들은 북을 치면서 동네 아이들과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이색 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밤에는 등불을 들고 북을 치고 다니면 유랑집단이나 남사당패와 같다고 사람들이 조롱하기도 했다’

수원 남문에서 지척에 있는 팔달산 자락, 수원시 권선구 교동 14-12에 소재한 수원성결교회(담임 송기식 목사). 현재 수원성결교회를 담임하는 송 목사는 이 같은 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결교회의 초기 전도자들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가 병원을 설립해 병자를 치료하고 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면서 간접 전도를 확대한 후에 교회를 세우는 방식 대신에, 미련하게도 노상에 나가 직접 전도를 한 큰 이유가 있었죠. 그것은 전도대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고 흥이 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였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그렇게 해서 동참한 무리들이 자연스럽게 교회를 조직하게 되었으니 노방전도는 지금도 성결교회의 상표처럼 돼있습니다.”
성결하다는 말 만큼 완전한 것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이 완전한 것과 같이 인간도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목표는 하나님을 통하여 악한 생각과 기질을 변화시켜 외적인 죄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거룩한 상태가 성결의 단계다. 이에 성결교는 신자로 하여금 죄 없고 거룩한 그리스도교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경험을 크게 강조하는 성화(聖化)교리를 바탕으로 한다.
성결교는 18세기 ‘체험적 신앙과 성결한 삶을 주장한’ 영국인 웨슬리에 의해 생겨난 감리교에서 출발한 개신교의 일파다. 수원의 성결교 유입은 천주교, 감리교, 성공회 다음으로 생겨났고, 수원성결교회는 평택교회 오명환, 독립문교회 류이옥, 동경교회 손준문, 이천 교회 이중문 등이 수원으로 이주해 오자, 성결교 교단에서 1928년 3월 이성봉 전도사를 수원에 보내어 교회가 설립됐다.
당시 조선은 일본이 강제로 점거한 후 한 때 유화정책을 쓰다가 다시 총칼로 위협하는 황민화 정책을 펴던 때였다. 1932년부터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학교를 폐쇄하고 1936년 8월 일본 미나미 총독이 부임하면서 강권정치를 한층 강화했다. 그는 긴박한 국제정세에 따른 불온한 책동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지시했고 신사참배는 일본 정신의 중추라고 강조했다. 한편 일본의 회유정책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1938년 2월 일제는 ▶교회당에 국기계양탑을 건설할 것 ▶기독교인의 국기경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일반 신도의 신사참배에 바른 이해와 여행을 힘쓸 것 ▶찬송가, 기도문, 설교 등의 내용을 검열, 임검 등으로 보다 엄중히 지킬 것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조치를 취할 것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 건설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등의 한국교회에 대한 시정방침을 결정하고 집요하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리고 한국교회 지도자 전원에게 ‘신사참배가 국민 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일본 천왕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국가가 첫째냐, 종교가 첫째냐?’ 라고 질문해 회피하는 자는 투옥했다. 이 때에 투옥된 교회 지도자가 전국적으로 2천여 명이나 됐다. 1942년 3월에 강제로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 조선혁신 교단’으로 개편하게 한 후 모세오경, 계시록, 다니엘서를 삭제케 하다가 나중에는 구약성서를 부성서로 하고 신약성서 가운데 4복음서만을 사용하도록 규제했다.
“당시 성결교는 교리적으로 인간을 심판하러 예수가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재림사상에 입각해 일본천황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예외 없이 심판대에 서야한다고 주장했죠. 그러자 일본은 성결교에 대해 불경죄를 적용하여 전국의 모든 성결교회를 폐쇄한 시절도 있었지요.”(송기석 목사)
또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통치전략에 따라 한국인 모두가 천황의 자식으로 전쟁에 사용할 국방헌금을 강요했고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각 가정의 놋그릇까지 수탈했다. 심지어 전쟁무기 조달을 위해 교회의 종과 각종 유기를 헌납하라고 강요하자, 수원성결교회는 국방헌금과 교회종을 일본에 헌납했다.
보고에 의하면 1942년 10월 평양 서문박 장로교회에 전국에서 모인 교회 종이 1천540개라고 밝혀진 것을 보면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 교회가 겪은 수모를 가히 짐작하고 남는다. 대표적인 예로 1943년께 수원성결교회를 일본헌병대가 강제 점령하고 난 후, 태평양 전쟁에 일본 군인을 위안하기 위해 강제로 동원한 위안부를 관리하던 정신대 간판을 버젓이 교회에 붙여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1928년 세워진 수원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하여 교회의 폐쇄, 교회 종의 헌납, 신사참배와 정신대 사무실의 장소 등으로 한국교회사의 중심에서 갖은 수난과 약탈을 당해왔지만 한 번도‘성결’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버린 적이 없는 교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