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집교회’라고 불리는 수원장로교회는 일본의 식민정책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38선 이북이 공산화되자 그것을 반대하고 남쪽으로 내려온,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현신규 교수(북한 평남출신), 이태현 교수(북한 함남출신) 등 장로교 신도 12인이 수원시 교동에 살고 있던 김갑희 씨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린 1946년 11월 27일이 그 첫 번째 날로 기록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장로교로서는 처음으로 수원에 입성하게 됐고 그 후 천주교, 감리교, 성공회, 성결교에 이어서 장로교 등의 순으로 수원에 기독교가 정착하게 된다.
인류 역사를 통 털어 교회는 가장 오래된 사회 조직체 중 하나다. 교회는 종교적으로 예배공동체로서 제의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 구체적으로 선·악을 변증하고 규정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사회적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는 종교적 기능을 가지는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전체 사회에 기여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반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현실 참여로 인한 교회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70년대와 80년대의 유신시절과 군사독재시절, 그리스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자유와 정의’를 내세웠던 교회는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부는 이러한 것을 표방하는 교회를 이념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저지하는 한편 교회의 종교 활동에 대하여 주목했다. 당시 많은 교회들은 권력에 능동적으로 순응하거나, 방관하면서 종교적 권익을 누리며 교회 확장을 꾀하였다. 이와는 달리 서슬 퍼런 군부독재를 향하여 ‘자유와 정의’를 외치던 교회는 편안한 길을 거부하고 가시밭길을 가는 구도자와 같았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유신시절과 80년대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경기 지역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각종 시국 집회와 금지된 강연이 열렸던 수원시 팔달구 교동 2-7에 소재한 수원장로교회(담임목사 강성우)는 한국교회에서 현실참여와 더불어 사회적 기능을 수반한 대표적인 교회라 할 만하다. 수원장로교회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광복 후, 우리나라는 세계 강대국에 의해 뜻하지 않게 남·북이 분단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됐다. 그래서 북한에 있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 이남으로 월남했다. 그들 중 상당수의 장로교인들이 서울과 인근 거리에 있는 수원으로 피난을 왔다. 당시 수원 지방은 초창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맺은 선교분할협정으로 인하여 감리교의 교세가 우세했다. 그래서 장로교의 교세를 가지고 있던 월남한 피난민들이 장로교회를 설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후 1946년 11월27일 처음 모여 예배드린 곳이 수원시 교동 김갑희 씨 집이었고, 이것이 수원 지역에 장로교회의 효시가 됐다’고 쓰여져 있다. 현재, 수원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강성우 목사는 “당시 장로교회가 없던 수원에 교회를 세웠으나, 절간자리라서 외관도 좋지 않고 장소도 협소하여 피난민을 비롯한 수원의 많은 교인들을 수용하기 어려웠다. 한국전쟁 후 국가재건 시기인 1954년, 수원에 주둔하던 미 공군 로건 목사의 도움으로 한국전쟁이 정전된 후 미군이 사용하던 군수물자 중에서 건축자재 일체를 기증받아 수원장로교회를 착공했다. 그때 교회 외벽의 건축공법으로 육중한 화강석을 사용한 것이 지금의 ‘돌집교회’란 애칭을 갖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현대식 교회의 형태를 갖추게 된 수원장로교회는 60년대를 거쳐 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사회는 70년대 들어와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선언 발표와 계엄령 선포에 의해 제3공화국의 헌정이 중단됐고, 같은 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함으로써 시작된 헌정체제에 돌입, 유신정권은 보안법·반공법의 강화, 집시법 개정 및 긴급조치의 남발 등을 통해 각종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탄압하면서 국민들로부터 자유와 주권을 빼앗았다. 이에 많은 사회단체와 종교단체가 침묵하는 가운데 수원장로교회는 경기 지역에서 민주운동의 대명사로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리라’는 주기도문처럼 돌집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자유와 정의’를 사회와 제도속에 실현하기 위해서 앞장선 것이다.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해 선봉에선 수원장로교회의 핵심에는 1966년 부임해 40년간 봉직한 윤기석 목사(현, 명예 목사)가 있었다. ‘기독교의 기본 윤리는 사랑’이며 ‘교회는 자유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윤 목사(한국기독교 장로회 교단 총회장과 경기도 교회협의회(NCC) 의장 역임)는 “유신헌법이 제정된 70년대, 경기도에서 열린 유신 헌법 설명회에 참석해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막는 유신헌법은 ‘민주주의 적’이라고 강하게 발언 하였죠. 그 후 우리 교회의 주일 예배 시간에 경찰이 상주했지만 저는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유신정권과 군부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죠”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윤 목사는 이어 군부독재 종식을 요구하는 국민항쟁이 들불처럼 번지던 1980년대 말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인환 목사님을 초청강사로 초빙했는데 수원시장이 만나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수원시장실에 가보니 경찰서장과 안기부요원이 문인환 목사님의 강의를 철회해 달라고 하더군요. 끝내는 거부했죠. 그랬더니 우리 교회 장로님들을 몹시 괴롭혔어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돌집교회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기꺼이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자세로 항상 두터운 수의를 준비해 놓고 강단에서 설교를 했던 윤 목사를 지탱해 준 믿음의 근원지였던 것이다. 수원장로교회는 돌집교회라는 애칭과 함께 60년을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선교적 과제를 안고 왔다. 우리 나이 육십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순리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60년의 세월을, 종교공동체 안에서 민주사회를 위한 운명공동체의 길을 걸어온 돌집교회가 믿음직한 바위 교회처럼 느껴졌다. (중부일보 07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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