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역사자료박물관

기독교유적지 2020. 8. 4. 11:15 Posted by allinda

http://m.kmib.co.kr/view.asp?arcid=0924139794&code=23111654&sid1=ser

'인천'은 기독교 유적의 보고입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를 통해
복음이 처음 들어온 곳이기도 하지만
극동방송이 시작된 곳이고,
서양식 최초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학당과
근대 복지시설의 효시인 해성보육원이 있는 곳입니다.

인천 최초 가톨릭 본당 답동성당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내리교회
강화 최조 교회인 교산교회 등

수많은 기독교 유적과 관련 박물관 등이 있습니다.

인천기윤실에서는
인천의 기독교 유적을 살펴보고
유적에 담긴 역사와 그 영성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9.18.(화) 저녁 7시입니다.
관심있는 분 누구나 환영합니다.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도 의미있고
일반성도들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참가자들께는 인천 기독교 유적의 정보가 담긴
[인천 순례길 가이드북]을 선물로 드립니다.

(기독교교육신문 김용현 기자) 양근대교 아래 양감도라는 작은 섬이 있고 천주교 양감성지라는 표지판이 있다.

1801년부터 1839년까지 근처에서 참수 당하고 맞아 죽고, 굶어 죽었던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다.

영언으로 가는 사다리 라는 이름의 조각작품 아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가 라틴어로 새겨 있다.





서해 지키는 복음의 섬… ‘바이블랜드’ 짓는다
한때 인구 90%가 기독교인 백령도 복음화의 비결
국민일보 입력 2018-08-24 18:18

http://m.kmib.co.kr/view.asp?arcid=0923996873&code=23111111&sid1=chr



남한 최초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인 중화동교회 전경.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백령도 교계와 인천 옹진군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바이블랜드’ 조감도.

김주성 백령한사랑교회 목사가 지난 21일 새벽기도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용기원산 끝섬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령도 전경.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최근 백령도의 선교역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천 옹진군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명 ‘바이블랜드’ 사업이다. 지난해 주민 및 교계 설명회를 거친 이 사업은 3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다. 29만㎡ 부지에 근현대사 문화공원과 선교역사관, 백령전시관, 카페 등이 들어선다. 백령도 선교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다.

지난 22일 백령도 백령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난 김주성(백령한사랑교회) 목사는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개신교가 1894년 9월 20일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지만 하나님께선 이미 반세기 전부터 한국선교를 위해 섬세하게 준비하고 계셨다. 그 중심에는 서해안,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인 백령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바이블랜드 완성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백령도라는 말을 주민들에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한국교회 역사에서 백령도의 선구적인 역할은 평범한 것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는 옹진군 관계자를 만나 백령도를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펴 왔다. 목회자들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백령도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땅이었음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게 김 목사를 비롯한 현지 교계의 한목소리다.

백령도엔 왜 기독교인이 많을까

백령도 교계에 따르면 백령도는 원래 인구의 약 90%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복음화율이 높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복음화율이 감소해 현재 60% 정도가 교인이다. 주일에 주민 대부분이 교회에 있어 외지인들이 문을 여는 식당을 찾기 힘들 정도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기원하는 의식인 풍어제나 마을의 풍요를 비는 당산제가 사라진 지는 오래됐다. 주민들은 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백령도엔 현재 군인교회 2곳을 포함해 12개 교회가 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중 4개 교회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백령도의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는 먼저 지정학적 위치를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중국의 육로를 통한 사역의 길이 막히자 자연스레 뱃길을 이용해 백령도에 상륙했다. 백령도는 당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백령도는 초기 한국 기독교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16년 영국 해군 H J 클리포드와 바실 홀이 백령도에 상륙했다. 서해안 일대의 해로(海路) 작성과 탐사를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백령도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눠줬다. 한국교회 최초의 성경 반입이었다.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는 백령도 주민에게 한문성경을 전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어 충남 고대도와 전북 군산, 금강 입구 등지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백령도 중화동교회에서 만난 조정현 목사는 “당시 성경이 구문으로만 전해져 안타깝다”며 “백령도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것이 1898년이고 당시 성경보존의 효용가치가 없었던 데다 국법에도 위배돼 보존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1896년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남한 최초의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다. 1894∼95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자연스레 신문물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백령도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과 유배를 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이 이듬해 서당에 중화동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이 교회 당회장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교회 앞 기념비에는 1900년 11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교인 7명에게 세례를 베푼 기록이 남아있다.

백령도에 온 피란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지정학적으로도 연관이 있다. 조 목사는 “북한을 코앞에 두고 최북단인 접경지역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주민에게 적극적인 구원관과 하나님 유일신 사상의 체계를 갖춘 기독교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천안함 사건 상처 딛고 예전 모습 되찾아

6·25전쟁을 전후해 좌우 대립이 거의 없었다는 일화는 백령도 주민들의 민심과 신앙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백령도 교인들은 북한 인민군 치하 3개월간 아무 탈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인민군이 ‘북한헌법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을 믿고 피란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인민군은 국군이 들어오기 직전 북한에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교인들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인민군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조 목사는 “당시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 백령도의 상황은 정말 특별한 거였다. 아마도 기독교의 영향과 백령도 주민의 단결이 그런 사랑의 결실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전했다.

백령도 교회들은 복음전파에 열심이다. 매년 8월 15일 민·관·군 연합예배를 드린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 저녁엔 각 교회를 돌며 연합기도회를 연다. 11월 마지막 주일엔 부흥강사를 초청해 영적 성장을 도모한다.

2010년 3월 백령도 인근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 온 국민에게 큰 상처였다. 백령도를 찾는 관람객의 발길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지금은 남북 긴장이 완화되는 가운데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조기연 아세아연합신학대 북한연구원장은 “백령도를 통해 복음이 남과 북으로 확산돼 나간 것처럼, 이제 백령도를 통해 남북이 하나 되는 역사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새롭게 떠오르는 서해안 시대에 발맞춰 한국교회사에 백령도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백령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1955년 “한국 기독교 문화 창달” 이라는 목적을 갖고 설립된 기독교문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초교파적 문서 선교 기관으로 설립된 기독교문사는 198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기독교대백과사전” 전16권을 비롯하여 다양한 기독교 양서들을 출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 교회의 신앙ㆍ역사ㆍ문화와 관련된 10만여 점의 귀중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의 설립자인 향산 한영제 장로는 이 자료들이 학계와 교계에 연구 자료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향산기독교문화연구원”을 설립했으며, 2001년 11월 11일, 일반인에게도 그 기회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경기도 이천에 본 박물관을 설립하였다.

20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현 부지 내에 “평양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하여 관람객들이 초대교회 신앙 회복과 문화를 체험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http://www.kchmuseum.org/

신순철님 페북에서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2144570285615331&set=a.362778000461244.82728.100001871400316&type=3&theater



초량교회,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선정…이바구길 명소 입소문

한강 이남 설립된 최초의 교회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 | 2018.01.26 19:46

- 독립운동·신사참배 반대 등
- 순교한 주기철 목사 첫 시무지
- 6·25전쟁 땐 피란민 수용소로
- 교인들 합심해 구국기도운동도

-교회 내 역사관에 관련자료 전시
- 연간 2000여 명 방문 인기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부산 동구 초량교회가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위원회가 지정하는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에 선정됐다. 

지난 23일 부산 동구 초량교회 역사관에서 김인준 행정목사가 견학 온 송도제일교회 중등부 교인들에게 초량교회 126년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서정빈 기자 photobin@kookje.co.kr

부산 동구 초량교회는 지난 24일 오후 교회당에서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제3호 지정 감사예배를 열었다고 밝혔다.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는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위원회가 지정하며 제1호로 서울 승동교회, 2호로 김제 금산교회가 선정됐다. 이날 행사는 초량교회 담임 김대훈 목사 사회로 1부 예배가 진행됐고, 2부는 총회 역사위원장 김정훈 목사 사회로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 지정식으로 이어져 지정증서가 전달됐다. 3부는 총회 역사위원회 부위원장 함성익 목사 사회로 ‘현판 제막식’이 열렸다. 

현재 부지에 1922년 건립된 옛 초량교회 건물. 초량교회 제공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역사위원회는 2015년 9월 제100회 총회에서 상설위원회로 조직됐다. 역사위원회는 6·25 전쟁 때 77명이 순교한 염산교회의 옛 예배당을 복원하고, 주기철 목사의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수난 기념사업을 벌이며 한국기독교 역사 사적지를 발굴·보존·연구·지정하는 일을 펼치고 있다. 

초량교회는 1892년 11월 7일 미국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1862~1931) 선교사가 현 중구 코모도호텔 부근인 ‘영서현’에 사택을 건축하고 사랑방을 예배처소로 개방해 선교함으로써 설립됐다. 초량교회의 전신인 이곳 ‘영서현교회’는 한강 이남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라고 총회 역사위원회는 설명한다. 베어드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마산 진주 김해 상주 안동 경주 대구 목포 전주 등지로 광범위한 순회 전도여행을 다녔다. 

영서현교회의 교인이 늘어나면서 1912년 영주동 봉래초등학교 앞에 있던 동사무소를 매입해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이때 명칭이 ‘영주동교회’다. ‘영주동교회’는 1922년 호주 선교부로부터 현 위치의 대지를 구입해 새 건물을 짓고 이전했다. 이후 ‘초량 3·1교회’로 불리다 최종적으로 ‘초량교회’로 개명됐다.

일제강점기 초량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은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항일 구국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순교한 주기철(1897~1944) 목사의 첫 시무지로 이름이 높다. 주기철 목사는 목사 안수를 받은 직후인 1926년 1월 10일부터 1931년 7월 5일까지 초량교회 제3대 위임목사를 역임했다. 1926년 신사참배 반대 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했고, 노회는 신사참배가 우상숭배라고 결론짓고 가결했다. 그는 마산 문창교회로 이임 후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연행돼 투옥됐고 고문받은 끝에 1944년 옥중 순교했다.

초량교회 인근에 있던 백산무역회사(백산상회)에서 활동한 애국지사 중에도 초량교회 신도가 다수 있었다.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제 등이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1914년 세운 회사로 상해임시정부 및 광복군을 지원하는 군자금 모금에 큰 역할을 했다. 초량교회 윤현태, 윤현진 형제 집사의 활약은 아직도 회자된다. 윤현진 집사는 백산상회가 후원한 독립자금 30만 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임시정부 재무 차장이 돼 재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초량교회는 전국 교역자와 교인들이 몰려 피란민 수용소로 기능했다. 교회 유치원은 휴원했고 뜰과 마당은 온통 천막으로 덮였다. 교인은 합심해 피란민 구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1950년 여름 초량교회에서 전국의 목회자와 성도가 국난 극복을 위한 금식 구국기도 운동을 전개했고, 기도가 끝난 9월 15일 기적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간 목회자들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은 하나님의 은혜”라 간증했다고 한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 http://kcmma.orghttp://kcmm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