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회고하면 평촌교회 림형식 목사는 생일잔치가 생각난다.
목회를 하신 아버지는 가족의 생일상을 못차리게 하고 성탄절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를 생일로 지내게 하셨다. '예수님 생일상이면 됐다'는 주장이셨지만 가난한 교구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는 뜻이 있으셨다.
그래도 원 생일에 목사를 찾는 사람들을 피해 아버지는 생신날 일부러 집회에 나가시곤 했다.
故 최수복 권사를 그리며… 림인식·림형석 父子목사의 못다한 사부곡&사모곡미수(米壽)의 늙은 목사는 한 달 전 하늘나라로 떠난 아내가 그립다. 회갑(回甲)을 맞은 그의 아들은 여전히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한국 최초의 4대 목회자 집안의 며느리와 사모로, 어머니로 살다가 지난달 초 소천한 고(故) 최수복 권사의 남편 림인식(88·노량진교회 원로) 목사와 장남 림형석(61·평촌교회 담임) 목사를 차례로 만났다. 부자(父子) 목사는 가슴 속에 묻어뒀던 아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 나의 아내여 나의 천사여…”#림인식 목사의 사부곡(思婦曲) 림인식 목사를 만난 건 지난 7일 오전 서울 흑석동 자택에서다. 거실 식탁 앞에 앉은 림 목사 뒤로 그의 5남매 자녀들의 가족사진이 좌우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시 127:3)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 한가운데 최 권사의 사진이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동안 장례식만 수백 번 집례하면서 여러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내 아내를 보내는 건 기분이 또 달라. 다르더라고….” 그는 휴지를 뽑아 붉어진 눈시울에 갖다 댔다. 아내에게 그는 어떤 남편이었는지 궁금했다. “평생 꽃다발 한 번 사들고 집에 들어가 본 적 없는 남편이었죠. 가정적으로는 낙제점일 거예요.” 림 목사는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20년 동안 아내에게 생활비를 주지 않았던 얘기부터 꺼냈다. “목회 초기 때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어요. ‘목사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책 살 돈이 많이 부족하니까 좀 이해해 달라’고….” 그는 교회로부터 월 사례비를 받는 날이면 지게에 책 꾸러미를 가득 싣고 집에 들어올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그럼에도 림 목사 부부가 63년 동안 한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딱 하나’ 덕분이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다른 점이 너무 많았어요. 서로의 성장 배경만 봐도 아내는 부잣집 딸이고, 나는 가난한 목사 아들이었죠. 나는 동적이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런 걸 싫어했고요. 체질도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서로 달랐어요.” 서로 같은 점이라곤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고 했다. “목회였어요. 아내는 목회자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나를 만났어요. 그리고 나의 목회를 위한 일이라면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도와주는 사람이었어요. 서로 다른 부분이 100가지가 넘어도 단 하나의 공통분모가 우리 부부를 꽁꽁 묶어 준 셈이지요.” 최 권사는 남편 설교에 대해서도 “당신 설교 너무 길어요. 설교내용이 너무 어려워요”라며 달고 쓴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아내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장례식 예배에서 그는 “당신은 나에게 특별한 천사였소”라고 고백했다. 림 목사는 그러나 아내에 대한 빚진 마음이 여전한 듯했다. “목회일변도의 제 삶 때문에 아내가 너무 많은 고생을 했어요. 남편이 알지 못하는 고민도 많았을 거예요. 제가 아내를 위해 해준 일도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림 목사는 6∼7년 가까운 아내의 투병기간 동안 병시중을 도맡았다. 생전의 최 권사는 당뇨병과 파킨슨병, 신장병 등 많은 질환을 앓았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마 20년 동안 생활비 안 줬던 것도 그때 다 용서해줬을 거예요(웃음).” 림 목사 어깨 너머의 사진 속 아내 모습에서도 엷은 미소가 비쳤다. “어머니 목소리가 그립습니다”#림형석 목사의 사모곡(思母曲) 아들이 생각하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는 가정예배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9일 경기도 안양의 평촌교회 집무실에서 만난 림형석 목사는 “매일 저녁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형석이는 대(代)를 이어 훌륭한 목사가 되게 해 달라’던 어머니의 기도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교회 일로 바쁘셨기 때문에 가정예배는 저녁에 어머니가 인도하실 때가 많았어요. 동생들과 돌아가면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던 습관이 우리 가족 모두의 삶 가운데 깊이 각인된 것 같아요.” 그는 어머니의 기도대로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어요. 목회를 안 했다면 오히려 더 막막했을 겁니다. 어머니가 매일 해주시던 기도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5명의 자녀를 두셨으면서도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으셨어요. 가래떡 하나를 먹을 때도 5등분으로 나눠 주셨거든요.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저마다 ‘어머니는 나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믿음이 확고했어요.”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이역만리 자식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민 목회 시절이었어요. 개척한 교회가 성장하고 제법 성공적인 목회를 하던 중 20년 만에 덜컥 귀국을 결심한 이유는 어머니 때문이었죠. 어머니가 ‘우리 가까이서 지내자’고 말씀하시는데, 거절을 못하겠더라고요.” 림형석 목사는 30대 초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미국에서 목회를 했다. 담임을 맡았던 미국 LA의 선한목자장로교회는 60여명이던 성도가 700여명까지 증가하는 등 큰 부흥을 이뤘다. 그는 어머니의 음성이 그립다고 했다. “20년 동안 떨어져 지내면서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목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좋았거든요. 위로가 되고, 힘도 나고….” 그의 넋두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 풍수지탄(風樹之嘆)의 마음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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