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의 교회 - 안양중앙교회

[10/22 중부일보]

경기도의 교회 - 안양중앙교회

안양시 만안구 안양4동 676-117 소재한 안양중앙교회(담임목사 김양수)는 1930년 5월 17일 안양리교회의 양동익 전도사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창립됐다. 같은 해 10월 당시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632번지 소재에서 예배당을 신축했고 1934년 9월 안양리 661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1954년 경 대한예수교장로회 안양교회에서 분립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속했으며 1989년 8월 새 교회당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양제일교회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 622-158 소재한 안양제일교회(담임목사 홍성옥)는 안양중앙교회의 초기 역사와 같이 안양리교회에서 출발했다. 1954년에서 1955년까지 안양중앙교회와 내분 상태에 있다가 1955년 2월에 노기원 목사가 부임함으로써 안양중앙교회와 완전히 분리됐고, 1965년 4월에 안양제일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 통합)로 교회 명칭을 변경하고, 1992년 6월 새 교회당을 준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양예수교회 교인들은 연래 과제였던 교회 예배당을 신축 낙성하고 지난 13일 주일부터 신축한 예배당에서 성대히 집회와 예배를 보았다. 교회는 그 곳 남주희씨의 호의로 집 한 채를 무료로 사용했고, 예수교 장로회 전도사 양동익씨가 열심히 전도한 결과 교인들과 다수의 현금을 마련하여 교인 중 이종복씨의 도움으로 지금 25평의 광대한 예배당을 신축했다." (안양리교회의 신축 예배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 1931년 12월 17일 7면 3단 인용)

안양중앙교회와 안양제일교회의 설립은 안양의 초기 교회의 모태가 된 안양리교회에서 출발한 교회들이다.
안양리교회는 1930년 5월 17일에 경부선 안양역전 인근의 안양YMCA에서 창립예배를 드렸다. 안양지방의 교회 창립 배경은 성경공부를 하던 신도들이 집단으로 예배를 보던 장소가 없었던 시절에서 비롯됐다. 신도들의 요청으로 조선예수장로회 경기노회의 후원을 받아 노회차원에서의 지원을 받아 양동익 전도사의 주도로 첫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이에 교회가 설립되자 교파를 불문하고 많은 신자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보아 안양리교회는 교파와 교단를 초월한 안양지역의 신앙공동체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에 15가정으로 시작된 안양리교회는 해방 직전에 115명의 신자로 늘어났고, 1930년, 교회당이 신축되고 난 후에 1931년 12월 17일 ??동아일보??에 보도 기사가 날 정도로 세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기록에 의하면 안양지역의 안양리는 경부선 철도연변이었고, 안양역이 생겨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 중 하나님을 믿는 개신교인들이 있었지만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개인적으로 성경을 공부 했다. 그러던 중 시흥군 남면 당리에 소재한 군포장교회를 시무하던 양동익 전도사를 만나게 되면서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성경공부모임을 조직하고 주일마다 성서를 연구하며 정기적으로 한 장소에서 모일 수 있는 교회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았던 것이다.
이를 보면 안양교회의 시작은 성서연구가 그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먼저 청년회관과 같은 일정한 장소가 정해지자, 교인들이 일정한 기간을 정하여 성경 공부를 하는 모임인 소사경회를 개최하고, 주일 오후에는 전 교인들이 출동, 전도를 했다. 교인들이 찾아 나선 집들은 자신들과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주로 철도 연변에 모인 노동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 철도노동자들, 소규모의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들인 것으로 미루어 보아 1930년대 당시 안양지방이 상 · 공업의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안양의 종교 개간에 있어 일제 강점기 하에 청록파 시인인 박두진이 안양리교회를 다녔다는 점이 눈에 뛴다. 일제가 대륙침략 전쟁의 말기에 이르러 우리 민족의 생명, 재산, 문화를 송두리째 강탈 말살하고자 할 때, 청년 시인 박두진은 25세의 나이로 그의 부친 박공근과 함께 가족 5인이 안양에 이주하면서 교인이 되어 그의 가족 모두가 1944년 8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 후 1948년에 안양리교회의 장로가 된 박두진은 신앙시를 쓰며 민족의 아픔을 노래했다.
박두진은 가장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 시편을 통하여 민족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의 시심의 원천이 기독교의 정신을 바탕하고 있음을 고백하면서 일제말기 예레미야의 노래, 나 여기에 있나이다 주여 등의 주옥같은 신앙시를 쓴 것이다. 이는 박두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안양지역 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 신앙적 삶의 모범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안양지방의 개신교는 안양리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교파들이 분립됐다. 특히, 안양중앙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는 강인병 목사가 주축이 됐고, 안양제일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는 노기원 목사가 주축이 되어 각 교회로 분립됐고, 교회 명칭이 변경됐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