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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한 '손종' 유일한 유물로 남아
-계몽역사관 및 야학교실 운영 중
-전문가 "계몽운동 상징과 근대건축물로 가치 있어"
-시급한 설립 연혁 입증과 원형 복원
▲ 군포시 둔대동, 수리산과 반월호수를 앞뒤로 한 배산임수 자리에 118년 역사를 간직한 둔대교회(현 둔대케노시스교회)가 있다.
여러분은 근대건축물을 어떻게 보시나요. 누군가는 미래유산으로 보고, 누군가는 흉물로 볼테죠. 견해가 서로 다른 까닭에, 그동안 수많은 근대건축물이 보존이냐, 철거냐 기로에 서서 온갖 수난을 겪어내야 했습니다. 안타까운 건 개중에 문화재로 가치가 높은 것들이 소실됐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지역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은 귀중한 근대문화유산을 앞으로 얼마나 더 허무하게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작합니다. 꼭 지켜야 할 미래유산을 찾아가는 여정을. 1876(개항기)에서 1970년 사이에 지어진 경기도의 근대건축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로 등록되지는 않았지만, 미래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들을 발굴해 보존 대책을 찾아보려 합니다. 선조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그대로 우리도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줄 수 있길 바라며편집자주

 

군포시 둔대동에는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종교시설이 하나 있다. <지키자! 미래유산> 두 번째 여정에 소개할 근대건축물 둔대교회'.

여느 교회에 비하면 보잘것없어 무심코 본 이들은 관심조차 없겠지만, 농촌계몽운동의 역사를 조금 안다면 둔대교회는 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 초라하지만 의미 있는 예배당

▲ 십자가가 달린 아치형 철기둥이 서 있는 교회 입구와 예배당 정면.

반월저수지 인근 작은 마을에서 수리산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왠지 사찰이 나올 법한 곳에 교회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자동차 한대 간신히 지나갈 만한 좁은 길 따라 이정표대로 100m쯤 더 오르니 십자가가 달린 아치형 철기둥이 서 있다. 여기가 바로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 불리는 둔대교회(현 둔대케노시스교회).

교회는 현대식 웅장한 교회에 비하면 아주 작고 초라하다. 마치 시골집 같아 입구에 십자가 기둥이 없었다면 교회임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낯선 차가 마당에 들어서니 강아지 두 마리가 요란하게 짖는다. 아무도 없는지 ‘계몽운동의 현장 둔대교회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예배당 벽에 걸린 현수막만이 반겨줄 뿐이었다.

▲ ①장작이 쌓여있고 비닐이 나뒹구는 등 정비되지 않은 예배당 좌측면 모습. ②우측면에 있는 예배당 주출입구. ③~④예배당 배면과 서까래. ⑤변인숙 부목사가 교회 지붕 말굽서까래를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⑥추녀 부분과 주심도리.

교회 예배당은 53 규모의 한식 목구조 형태다. 페인트칠을 새로 했는지 건물 외벽은 비교적 깨끗하다. 반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지붕은 한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진각 형태에 서까래만으로 이뤄진 홑처마다. 여기에 종도리, 주심도리, 대량이 있는 삼량가(三樑架) 구조다.

추녀 부분 서까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통한옥에서 주로 사용하는 선자서까래(부챗살 모양)가 아닌 말굽서까래(방사형)로 배열한 것이 눈에 띈다. 말굽서까래는 선자서까래를 제대로 걸 수 없는 서민들의 살림집이나 추녀가 긴 우진각 지붕에서 사용됐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소박한 가옥 느낌이다.

특이한 점은 예배당의 출입문이 우측면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정면 출입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건립 당시 서양 건축문화의 영향을 받아 장방형으로 지어진 특성과 좌측면에 산을 등지고 있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 예배당 내부는 2003년 샌드위치 판넬로 개보수해놔 예전 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는 계몽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호롱불 체험 등 야학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4개의 계단을 올라 문고리를 당겨보니 예상대로 굳게 닫혀있다. 한참 뒤 교회에 온 변인숙 부목사의 도움으로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예배당은 현재 계몽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벽면 가득 교회 역사(계몽 운동의 발자취)에 관한 스크린이 걸려있다. ‘야학교실이라고 적힌 호롱불도 바닥에 여러 개 놓여있다. 교회를 찾는 이가 많지는 않지만 방문하는 이들에게 근대시대 야학을 재현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내부 구조다. 천장과 벽 모두 샌드위치 판넬로 보수해놔 서까래나 상량 기록 등 예전 모습은 파악할 수 없었다. 다만 교회 관계자들은 내부 벽체가 조적벽으로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좌측면 내부 벽이 마감 없이 조적벽으로 노출된 것을 통해서다. 창문 역시 목재창이었던 것을 알루미늄 창호로 변경했다고 한다.

변인숙 부목사는 “2003년 단열 때문에 고쳤는데 골조는 예전 그대로다. 창문 틈으로 판넬 안쪽이 보이는데 일본 신문으로 벽지를 바른 흔적도 있다.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역사를 보존했을 텐데 아쉽다고 했다.

▲ ①교회 앞마당에는 종이 없는 오래된 종탑이 세워져 있다. ②10년 전 새로 만들어 놓은 종탑. ③~④둔대교회의 유일한 유물 '손종'.

교회 앞마당 구석에는 종탑도 세워져 있다. 본디 목재로 된 지지대였으나, 유지를 위해 80년대 철근으로 개조했다고 한다. 종탑 안의 종은 없다. 3.1운동 때 일본인들이 떼 갔다고 한다. 대신 마당 뒤편에는 예전의 종소리를 그리워하는 주민들을 위해 10년 전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종탑이 있다. 

교회의 유일한 유물로 남아있는 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썼다고 알려진 손종이다. 손종은 예배시간이나 공부시간을 알리기 위해 들고 다니며 울리던 종이다. 나무 손잡이에 금이 가 있지만 종소리는 여전히 맑고 청아하다.

예배당과 종탑이 많이 훼손된 건 안타깝다.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큰 결함은 없어 근대건축물로 가치가 있어 보인다.

 

◆ '박씨 고택'에서 시작된 예배 그리고 농촌계몽운동

▲ ①둔대교회 아래 자리하고 있는 '박씨 고택'. ②둔대교회의 1903년 설립부지와 1936년 신축부지 위치(1911년 지적도). ③1910년 둔대동 434번지 토지대장 명단.

둔대교회는 한국 교회 건축사뿐만 아니라 군포 근대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예배당 외벽에 걸린 현수막 내용대로 농촌계몽운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대한감리회에서 발행한 둔대교회 역사 자료에 따르면, 둔대교회는 1902년 군포 지역 일대에서 가장 부자였던 박영식 씨의 집 사랑채(현재 교회 아래 자리하고 있는 향토 유적 1 박씨 고택’)에서 시작됐다. 박 씨는 당시 5세였던 어린 손주 용덕 씨에게 신교육을 시키려고 배재학당 출신 황삼봉 선생을 독선생(가정교사)으로 초빙했다. 그런데 황 선생은 단순히 독선생에 머물지 않고 계몽운동을 활발하게 병행해 용덕 씨뿐 아니라 주민들까지 모아 예배와 교육을 실시했다.

이를 본 박 씨는 1903년 봄 둔대동 354번지에 작은 토담(초가로된 흙집 교회)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후 1910 12월 박 씨는 자신의 집 뒷산 기슭인 둔대동 434번지를 기증하고 1936년 교회를 신축했다. 그 자리가 바로 현재 남아 있는 둔대교회 예배당 자리다. 기증한 땅의 토지대장 명단에는 주학준, 박성만, 박돌이, 박선용, 주순원, 이용현, 김규풍, 김경준, 김덕민 등 총 13명이 공유한 것으로 돼 있다. 당시 목회자가 전도와 교육을 이동하면서 행했기에 개인을 지정하지 않고 마을의 신도들과 토지를 공유하는 방법으로 기증한 것으로 추측된다. 

▲ 1935년 감리회보에 기록된 둔대교회 야학 내용.

경술국치 이후 교회는 몇 차례 곤욕을 치렀다. 군포 지역 3·1운동 중심지라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령의 교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일본 순사들이 교회 문에 못질을 해서 폐쇄시키고, 종소리에 주민들이 몰려와 만세운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종탑의 종도 떼어갔다. 나뭇단을 가져와 불을 지르기도 했다. 다행히 불이 타다 말아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증언한 분들이 모두 작고해서 뒷받침할 증거는 부족하다.

박 씨의 후원과 황 선생에 의해 시작된 둔대교회 교육 활동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야학으로 정착됐다. 1935년 감리회보에 따르면 당시 교회 야학 학생이 50, 신통자 2, 교사 3명이었고, 교장은 박인기 장로(박용덕 씨 동생)였다. 이후 6·25전쟁 때는 인근 반월국민학교가 불타버려 소실되자 임시교사 구실을 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6·25 직후 반월저수지가 조성될 때는 마을이 수몰되는 것도 지켜봤다. 둔대교회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고 이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118년 동안 한자리에 서 있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굴곡을 같이 한 의미있는 장소인 것이다.

 

◆ 상록수 최용신의 '샘골교회'와 밀접한 관계

▲ 둔대교회와 샘골교회 위치도(1922년 지도) 및 소설책 '상록수'.

둔대교회는 1907년에 세워진 안산 샘골교회와도 인연이 깊다.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 선생은 농촌계몽의 필요성을 느끼고 1931년 샘골교회로 와서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을 곳이 없어서 힘들어하자, 1932년 박용덕 씨가 본인 소유의 부지 3천471를 기증해 샘골교회 강습소가 설립됐다. 샘골 지역의 근대 교육이 성행하도록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이다. 이는 독립운동가 염석주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고 알려졌다.

최용신 선생도 4km 떨어진 둔대교회를 여러번 다녀갔다. 오늘날에는 안산과 군포로 나뉘어 있지만 당시엔 걸어서 다닐만한 거리였다. 똑같이 감리교 소속인 두 교회는 연합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연합집회를 열기도 했다. 함께 계몽운동을 실천하며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 원형 복원 및 정확한 설립 기록 찾아야

▲ 1975년 12월 28일 당회록에는 둔대교회가 1906년에 설립됐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1976년 12월 26일자 당회록에는 창립 날짜를 12월 11일로 결정했다고 기록돼 있다.

한 세기 이상 지속된 교회사는 그 자체로 중요한 향토사다. 문제는 둔대교회의 경우 설립 연혁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감리회에서 교회 역사를 기록한 자료에도 1902년 예배 및 교육 시작 1903년 봄 토담교회 설립 1910 12월 교회 부지 기증  1936 8월 교회 신축 등 연도 외 날짜가 불명확하다. 설립일을 인증하는 현판도 없다. 그 시절 조용히 계몽운동을 하던 장소인 만큼 현판을 만들어 걸기 어려운 건 당연했을 것이다. 교회 관계자도 그저 토담 자체가 현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으려면 확실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교회 측에서도 이를 인지하고 입증 자료를 찾는데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우선 강인태 담임목사가 찾아낸 1975 12 28일 교회 당회록에는 창립일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김금준 집사가(박용덕씨의 배우자) 당회원들이 모두 있는 곳에서 이야기함으로 73년 된 것이 확인됨 이라고 증언한 부분이다. 1975년으로부터 73년 전이면 1903년경이다. 당시 당회장 김광원 전도사의 도장까지 찍힌 이 회의록이 둔대교회 건축을 가늠하는 최초의 기록이다. 이후 1976 12 26일 당회록에는 창립 날짜를 알 길이 없어 12 11일로 당회에서 결정하고 그 주일을 축제일로 한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현재 둔대교회 주보에는 교회 창립일이 1903 3 1일로 명시돼 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확인해보니 1987 1 1일 당회에서 김금준 집사가 “1903년 봄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예배당을 지었다고 증언하고, 3.1운동 때 관여한 점을 빌어 결국 설립 일자를 1903 3 1일로 정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기록이 입증 자료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나무 지지대로 만들어진 종탑과 보수 전 예배당의 옛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시기 미상). 군포시 제공

강인태 목사는 둔대교회가 문화재로 지정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는 계몽운동의 현장이다. 잘 유지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나라 역사를 알리는 장소로 활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설립 연혁을 입증할 자료가 확실히 있다면 문화재로써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안국진 경기도 문화재위원(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이라 장소성에 크게 의미가 있고, 한옥 양식의 건물을 교회로 썼다는 점에서 교회 발전사에 문물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건축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다만 원형의 모습을 갖춰야 근대건축물로 더욱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제언했다.

둔대교회는 유서 깊은 신앙의 성소다. 설립 입증 자료를 찾는 것도 시급하지만, 과거 모습과 비교 연구를 통해 훼손된 곳을 복원하는 등 본래의 모습을 갖추고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사진=황혜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