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균관대 입구에서 학교 정문을 향해 걷다가 정문 즈음에서 왼쪽으로 접어들면 성대와 창경궁 담 사이의 길이 이어진다. 세모꼴 마을의 막다른 길이다. 길 끝은 성대 캠퍼스와 창경궁으로 막혔다. 그 막힌 지점에 절개지를 파고든 기형적 형태의 옛 우물이 어떠한 설명도 없이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은 ‘왕의 우물’이라 했다. 조선 시대 임금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한다.

서울 새싹교회 지하에서 성경 원전 공부 지도(1989년).


그 우물 앞으로 평범한 2층 양옥이 자리한다. 예전 새싹장로교회다. 지금은 성대생을 주 입주자로 받는 원룸형 양옥이 됐다. 이 새싹교회는 2000년대 초반 시나브로 폐쇄됐다. 1950~80년대 한국 사회와 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박태선 문선명을 둘러싼 이단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 신사훈(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박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곳이다.

신사훈 (1911~1998)


신사훈의 ‘나의 투쟁’은 외롭기 짝이 없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학자적 양심을 저버린 흉악한 이단 사냥꾼”이라고 몰아붙였고 기성 교단은 ‘그의 투쟁’을 ‘대화’라는 장으로 이끌려 했다.

어찌 됐든 그는 강연장에서 인분 투척에 따른 수모를 당하고 테러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기독교이단연구자 탁명환(1937~1994·전 한국종교문제연구소장)처럼 누군가의 표적이 돼 살아야 했다. 탁 전 소장은 결국 이단 교회 신도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요즘 한국교회는 이단과의 전쟁 중이다. 멀쩡한 예배당이 이단에 접수되는 경우가 적잖다. 예배당 건축을 무리하게 하다가 매물로 내놓으면 이단이 매입하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정통 신학교조차 이단에 넘어간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많은 교회가 예배당 출입문에 ‘신천지 출입을 금합니다’ 스티커를 붙였다.

15개 언어 독해 ‘진짜 박사’

1957년 11월 7일 동아일보 가정면. ‘여성과 신흥종교’라는 큼지막한 기사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그 긴 기사의 바이라인이 ‘S記’이다. 당시 서울대 종교학과 신사훈 교수의 글이다.

‘사교성을 띤 신흥종교의 80%는 부녀자층이다. 경상도의 천지대안교, 충청도의 백백교, 전라도의 태극도 등이 신앙의 자유에 편승한 대표적인 것들인데… 사변(6·25전쟁) 후 근대화된 신흥종교에 휘몰린 광신도들이 끼치는 해독은 과거와 족히 비할 바 없는… 근대화된 신흥종교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외래 종교를 비롯하여 문선명씨의 통일교회 그리고 요즘 사회문제까지 되고 있는 박태선씨의 감람나무교(혹은 전도관)운동 등을 말하는 모양이다.…’

S 즉 신사훈은 이 글에서 자신이 책 ‘이단과 현대의 비판’에서 쓴 주장을 마치 다른 사람 얘기처럼 옮겼다. 그만큼 이단 지칭 문제는 민감하고 위험했다.

신사훈은 이단 감별 종교운동가가 아니었다. 신학자였다. 이단 문제를 연구하는 어느 학자가 “한 세기를 빨리 태어난 분과 같은 천재성을 지녔다”며 “그의 앞서간 신학 체계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신학자 겸 철학자 도올 김용옥을 비슷한 학자 유형으로 들었다.

신사훈 고창 생가. 명창 신재효가 살던 집. 경향신문 제공


신사훈은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1812~84)의 현손이다. 전북 고창읍성 앞 신재효 고택에서 자라 당시 명문 고창고보를 나온 수재였다. 그는 새어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갔다. 고보 시절 영어교사가 영어 성경을 권하자 경성에 신약성경을 주문해 읽을 정도였다. 졸업할 때까지 25번 성경을 통독했다. 그는 그 시절 교회에서 기도로 날을 새다시피 해 ‘신사무엘’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고창읍성이 산기도 장소였다.

고창고보 동창회. 가운뎃줄 왼쪽 세 번째가 시인 서정주, 그 다음이 신사훈(1982년). 경향신문 제공


그는 언어·수학 등에 빼어난 실력을 보였다. 우등·수석을 놓치는 적이 없었다. 도쿄 아오야마가쿠엔 신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대학에서 성경 원전을 읽기 위해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불어 독어를 독파해 깨쳤다. 그리고 1937년 미국 드루대학과 프린스턴대학에서 신학을 마쳤다. ‘희랍어 상’ ‘팔레스타인 연구상’ ‘신학학술상’ 등을 받은 한국인 수재였다. 뉴욕대학과 스탠퍼드대학 교수(1942~1945)도 역임했다. 15개 언어 독해가 가능했다. “박사 중에 진짜 박사”라는 평이 따랐다.

미국 유학 시절(1945년 무렵) 모습.


그는 귀국 후 감리교신학대 학장(1946~47)을 거쳐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1947~76)로 봉직했다. 미 군정과 5·16 군사정부가 그를 영입하려 끈질기게 노력했으나 “내가 그런 시시한 것을 왜 해”라며 거절했다. 그는 신학자·목회자의 길만 걷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서울대 기독 학생들에게 국산품 애용 등 신생활운동을 주창하며 인간의 내적 개조를 촉구했다. ‘통일론’ 연구 등을 통해 공산주의는 배척했다. “타국 공산주의는 자국 위주 것들인데 우리는 사대사상과 외세를 이용하는 악질로 김일성이 그러하다”고 분개했다. ‘공산주의 비판,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의의’ 등의 저서 제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 근처 풍산공원묘지 안에 있는 신사훈 묘와 비석. 신세희 제공


신사훈은 비성서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 박태선과 문선명은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함석헌(1901~89·기독교사상가)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측과는 불화를 겪었다. 어쩌면 결이 다른 지식인의 신앙적 신념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다. 우군 없는 외로운 싸움에서 돈키호테처럼 비치기도 했다.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 소망이 없다”

그는 “현대 한국교회는 부패했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니 새싹운동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드러나지 않는 신흥종교들이 기성 교단에 끼어들어 특히 부녀자들을 흔들고 있는데 대부분은 그들도(이단들도) 역시 기성 종교들이 부패하고 낡았다고 주장한다”는 그의 분석은 마치 요즘 교계 현실의 실사판이라고 해야겠다.

서울 명륜동 천부교 명륜교회(흰색 건물) 골목. 새싹교회 반대편에 있다.


그는 결국 똥물을 뒤집어썼다. 68년 서울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에서 문리대 주최로 열린 ‘유사종교 비판강연회’에서 인분 테러를 당한 것이다. 79년 4월에는 서울 남대문교회 교육관 신앙강좌에서 폭행 사건도 겪었다. 새싹교회 강단에 들이닥친 반대파들이 “신 독사!”라고 외치며 붙잡아 꿇어 앉히고 자신들에 대해 비방 않겠다는 각서를 쓰게 했다.

그가 서울대 교수 정년을 앞두고 있을 때 기자들이 은퇴 후 어떻게 살지를 물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 충성스럽게 살다 죽는 게 내 생의 목표입니다.” 아들 신세희 전 중앙대 교수는 “아버지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같이 의로운 삶을 사신 분으로 오직 복음에 목숨 건 분이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096430

국민일보

“일본에 아첨하던 친일파가 독립 이후 한국에서 권력을 쥔 것은 정치세계만이 아닙니다.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친일 목사들이 해방 후 한국교계에 지도자로 나섰다는 겁니다. 형무소에서 고생하신 출옥성도들은 모두 제외되고 지도자의 위치에 설 수 조차 없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 조수옥(1914∼2002·인애복지재단 설립자)이 1998년 무렵 한 일본인 목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다.  

1938년 10월 어느날 경남 사천군 삼천포읍(현 사천시) 삼천포교회 전도사 조수옥은 사천경찰서 유도관으로 끌려갔다. 관내 장로회, 성결교, 안식일교, 재림교 등 기독교관련 모든 목회자 등과 함께였다. 경찰서장이 말했다.


“당신들은 오늘 당장 신사참배를 하러 가야 한다. 참배 거부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다.”

한 달 전 그가 속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그 여파가 남해의 한 소읍에까지 미친 것이다.

“저는 그 자리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해선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마음으로 결정하고 있었습니다. 참배를 하더라도 지장이 없다는 총회의 이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죠. 그런데 그날 모두가 신사참배에 동참했습니다. 제게 신앙을 지도하던 목사도, 연륜 많은 장로도 모두 참배했습니다. ‘난 가지 않는다’고 되새기면서 교회로 돌아왔어요. 체포를 각오하고 있었죠.” 

그해 교계지도자 윤치호(1865∼1945·당시 연희전문 및 이화여전 이사)의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오전 8시 조선신궁에 갔다. 흥업구락부 모든 회원 20여명이 참배했다. 종로경찰서 관내 있는 기독교 가정들은 놋쇠로 된 물건을 하나씩 거두어 조선군사령부에 제출했다. 620종이 서울YMCA에 답지해 경찰서로 넘겨졌다. 경찰은 굉장히 기뻐했다.’(38년 9월 13일)  

‘…감리교 총회가 속개됐다. 오후 1시30분 배재중 운동장에는 기독교 학교 전교생과 서울의 감리교 신도들이 모였다. 예배를 마친 후 양주삼 박사가 앞장선 채 7000명이 넘는 인원이 총독부 청사까지 행진해 천황과 총독 만세를 불렀다.…3시쯤 조선신궁을 참배했다.’(38년 10월 7일) 

조수옥은 한국교회의 민낯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크리스천 여성으로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오직 말씀만 붙잡고 세파를 이겨낸 반듯한 그의 삶에서 우리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해방 후 친일 목사들이 돌변하여 교계지도자로 나서고, 그런 죄악의 뿌리가 기독교 혐오로 나타난 지금의 현실에선 더욱 그러하다.

‘신사참배’한 교계 지도자들의 민낯 

스물넷의 여자 전도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일본 경찰의 공포에서 해방된 승리자로 죽고 싶어서 기도를 했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더욱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였다”는 가녀린 어린양. 삼천포교회로 돌아온 조수옥은 그 공포를 이기고자 삼천포읍 북쪽 와룡산에 올라 칠흑 같은 공포와 싸우며 자신을 하나님께 던졌다. 경찰에 잡혀 죽느니 산에서 기도하다 죽는 게 낫다 생각해서였다. 80대 할머니, 40대 여집사와 함께였다.

조수옥은 깊은 밤 ‘주여 주여’를 부르짖었으나 공포가 가시지 않았다. 조수옥은 두 사람과 떨어져 홀로 바위 위에 앉아 모포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기도했다. 하지만 울음만 나왔다. 

“그런데 ‘두려워 말라’(사43:1)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이 제게 주어졌다는 거죠. ‘하나님, 저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신 이상 제게 용기와 힘을 주십시오. 두려움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라고 절실히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아침이 됐어요.” 

다음날 경찰서장 방으로 잡혀갔다.  

“너는 왜 신사에 가지 않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갈 수 없습니다.” 

“총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정당한 사유가 되지 않는다. 나의 관할구역에서 떠나라!”

추방은 당시 일경이 위신을 세우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관내 신사참배 100%라는 보고서를 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조수옥은 삼천포를 떠나 신사참배 거부투쟁의 거점 부산 초량교회에 부임했다. 교인은 500여명이었으나 목사 없이 장로 중심으로 유지됐다. 이약신 목사가 참배 거부로 경찰 압력에 못 이겨 사임했기 때문이다. 눈코 뜰 새 없이 예배를 인도하며 충성했다.  

그리고 조수옥은 39년 4월 경남 진주의 진주성경학교에 다니러 갔다가 체포돼 경찰에 다시 연행됐다. 그가 졸업한 이 신학교는 참배거부로 폐쇄됐던 것이다. 그는 북부산경찰서로 이송됐다.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나는 일본 신들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 천황은 신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조수옥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이 년을 죽여” 소리가 들렸다.  

이튿날 일단 석방됐다. 한상동(1901∼1976) 이인제 주남선 최상림 목사 등 부산·경남 목회자와 교인의 반발을 우려한 술책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대개의 예배당에는 신주와 히노마루(일장기)가 걸려 있었고 천황을 찬양하는 기미가요가 흘러나왔다. 예배도 동방요배를 하고나서 드렸다.  

그 해 여름 조수옥은 한상동 한정교 윤술용 이인제 목사 등과 부산 수영해수욕장에서 비밀집회를 갖고 거부투쟁을 전개했다. 한 목사가 지도자였다. “영전(靈戰)에 임해 죽기까지 싸워 순교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40년 5월부터 대대적 검거가 시작됐고 조수옥은 9월 20일 체포됐다. 이듬해 7월에 평양형무소로 이감됐다.

“추위보다 수치가 견디기 힘들었다” 

지난주일.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팔용로 마산동교회(전호성 목사) 예배당. 전 목사와 권오태 장로, 조성철(66) 인애복지재단 이사장 등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새 정부에 대한 기도도 있었다. 마산동교회는 재단 설립자 조수옥의 선교정신을 받든 교회다. 교회는 재단이 운영하는 강당을 활용하고 있다. 재단 모태인 마산인애원(현 마산인애의집)은 경남 사회복지의 산역사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기도하는 하나님의 딸이었습니다. 기도 응답 없이 출옥한 뒤 어찌 고아들을 챙길 수 있었겠습니까. 6·25전쟁 직후도 아닌 1945년 11월에 고아원 마산인애원을 시작했습니다. 형무소에서 쇠한 몸을 추스르지도 못하시고요.” 

조 이사장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는 마산 장군동사거리 당시 인애원 앞에 버려진 전사 국군의 아들이었다.

이날 오후 조 이사장, 오진웅(47) 재단 국장 등과 함께 장군동사거리 옛 인애원 터를 찾았다. ‘장군동다리’로도 불리는 사거리는 마산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시청 등 기관과 명문 중고교가 있던 번화한 도심이었다.

“우리는 교복을 입고 고아원 문을 못 들어가 뱅뱅 돌았어. 남들 눈을 피해 쏜살 같이 들어가야 했지. 고아원 아이라는 게 창피했거든. 나중에 어머니가 우리들 사정을 아시고 ‘마산인애원’ 간판을 떼 버리셨지. ‘너희들 집인데 당당하게 들어가라’면서 말이야.” 

조 이사장이 이제는 음식점으로 바뀐 ‘옛집’ 대문 자리를 보면서 오 국장에게 이같이 말했다.

“늘 정갈하고 그러면서도 대담하셨어. 전쟁 직후라 먹을 게 항상 부족했어. 우리들 100∼200명 먹일게 없을 땐 ‘자 애들아 말씀으로 배부르자’고 하며 달래셨지. 그땐 무슨 얘기인지 몰랐어. 그래서 가출도 두어 번 하고. 허허. 불효자지.” 

다시 일제강점기. 조수옥의 감옥생활은 지옥과 다름없었다.  

“마룻바닥에 배설물이 그대로 있었고, 구더기가 꾸역꾸역 기어 나왔어요. 꽁보리밥 한 주먹이 주어지는데 구더기와 생김새가 같아 먹을 수가 없었어요. 변기통 안에 사는 것과 같았죠. 평양형무소로 한상동 최상림 주남고 목사, 이현숙 장로 등과 함께 이송됐어요. 그곳 감방은 벼룩과 빈대로 견디기 힘들었죠. 무엇보다 10월∼5월까지 계속되는 추위가 말도 못했죠. 담요가 얼어 아침이면 두꺼운 나무판자처럼 딱딱했죠. 최 목사님은 고문과 후유증으로 형무소에서 돌아가셨어요.” 

조수옥은 형무소에서 네 가지를 배웠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다. 고아를 돌봐야 한다. 돈은 모든 악의 뿌리다. 

6·25 전쟁 전에 설립된 인애원 

조 이사장이 인애원 개원 배경을 말했다. “감옥에 들어온 이들 중 많은 사람이 고아였답니다. 부모사랑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죠. 어머니는 누군가 대신해서 그 사랑을 베풀어야 된다는 지극히 성경적 실천을 확실히 깨달으신 거죠. 저는 어머니의 수난 가운데 너무 마음이 아픈 대목이 있어요. ‘아프고 추운 것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게 수치였다’. 여성인권이 어디 있었겠어요. 봉두난발한 자기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드셨겠지요.”

조수옥의 항일은 평양지방법원 공판기록이 말해준다. 이 기록을 들여다보면 신사참배 거부가 명백한 독립운동임을 절감한다. 그런데 국가는 종교신념쯤으로 보고 독립운동 인정 요구를 회피한다. 정작 편들어야 할 교계는 출옥 성도의 사료 확보와 섬김에 소극적이다.  

조수옥은 약한 자였다. 하나님의 의(義) 앞에서는 강한 자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이 그랬듯, 독립군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랬듯 출옥성도들도 친일파에게 당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교계지도자의 박해를 받은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국가와 사회단체는 조수옥에게 국민훈장동백장(1986년) 일가상(97) 용신봉사상(97) 유관순상(2002)을 수여했다. 정작 교계는 역사적 평가 작업을 소홀히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에 조수옥과 신사참배 거부 출옥성도는 어떤 의미인가. 부끄러워 불편함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아직 살아 있는 것 아닐까. 

조 전도사 행적 알려지기까지 

1970년대 증언집 출판 계기로 일본 교계 대상 수십 차례 간증
 

조수옥은 생전 일본인 목사 와타나베 노부오에 의해 일본에 알려졌다. 

1974년 아시아칼빈학회 참석차 한국 방문을 했던 와타나베 목사가 조수옥 증언집을 일본에서 출판했던 것. 이를 계기로 조수옥은 일본 교계와 사회단체를 대상으로 수십 차례 간증을 했다. 우리 교계는 불편해 했다.

와타나베 목사는 게이토대학 철학과를 나와 도쿄고백교회 목사, 일본기독교신학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전쟁 책임을 지고’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 등이 있다.  

창원(마산)·사천·부산=글·사진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58210&code=23111111&sid1=c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