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한 영은 범죄하지 않음
다시 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새로 난 것이기 때문에 깨
끗한 것이고 거룩한 것이며 털끝만큼도 죄가 없는 것입니다. 새 생명
이므로 다시 타락하지 않습니다. 중생한 영은 다시 타락하지 않고 지
옥에 가지 않습니다. 한 번 중생한 사람도 범죄하면 다시 지옥에 간다
고 믿는 교단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한 번 중생한 사람
은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라고 믿습니다. 칼빈주의 즉, 장로교 교
리는 한 번 중생한 사람은 다시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루터파, 알미니안주의는 한 번 중생한 사람도 죄를 지으면 지
옥에 간다고 얘기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새로 만드셨는데, 진리
의 말씀의 씨로 성령께서 만들어 놓으셨는데 어떻게 지옥에 갈 수 있
겠습니까? 한 번 중생한 사람은 타락하여 지옥에 갈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은 새 생명이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의 말
씀과 성령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중생한 영은 범죄하지 않고 범죄 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박윤선 목사의 요한일서 주석에 보면, 새로 거듭
난, 새 사람은 범죄할 가능성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맞습니다.
새 생명이 어떻게 범죄하겠습니까? 범죄하는 것은 우리 인간 속에 있
는 부패성, 그 부패성이 저지르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새 사람인데, 옛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옛 사람은 부
패성이고, 새사람은 중생한 영입니다. 우리는 중생한 영을 받았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영입니다.
중생한 증거는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지는 것임
‘내가 중생 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5:1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
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
께로서 난 자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중생한 것입니다. 중
생한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가 구주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지면 그것은 중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이 구
주로 믿어지면 중생한 것이고, 안 믿어지면 중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면 예수님이 우리 속에 쏙 들어 옵니다. 예수님의 영이 들어오고 양자의 영이 들어오고 우리에게 새 생명이 시작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믿습니다”하는 것은 상당히 좋은 것입니다. “믿습니다”, 한 마디만 해도 모든 것을 다 받은 것입니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양자의 영이 들어오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호적에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이 상당한 보배입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
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
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하였고, 요한일
서 3:9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
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서 났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범죄치 아니한다고 하였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중생한 영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
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씨는 죄
가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에 죄를 짓
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씨로 중생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씨는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시고
살려 놓았기 때문에 다시 범죄하지 아니하고 의(義)만 좋아합니다. 털
끝만큼도 죄가 없습니다. 악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 속에 중생한 영
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육신의 부패성도 있습니다. 즉, 옛 사람과 새
사람 둘입니다. 육신의 부패성은 옛 사람이고 새 사람은 중생한 영입
니다. 내 마음과 몸이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의를 행하고, 부패성을
따라 살면 죄를 짓게 됩니다. 속에 부패성이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 살
면 죄를 짓고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의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
국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의의 병기(兵器)가 되는 것이고 부패성을
따라 살면 죄악의 병기, 불의한 병기가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임
본문 8절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
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역사
로 중생 시키신다는 뜻입니다.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이
됩니다. 자기도 알지 못합니다.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입니다.
협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협력해서 중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의 단독적인 역사로 살려 놓는 것입니다.
살려 놓을 때에 어떤 사람은 거꾸러져서 회개하기도 하고, 또 살려
놓았지만 자기도 알지 못하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후자
의 경우 그러다 얼마 후에 중생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당장에 중생한 것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
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주여 뉘시오니이
까”하며 바울이 당장에 거꾸러져서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
은 중생을 해도 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언제 중생했는지 몰
라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이 믿어지면 그것은 중생한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은 중생한 것이 아닙니다.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믿음을
주셔서 예수가 구주인 것을 믿어지게 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은 죽은
영혼이 아니고 산 영혼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그 영혼이 죽은 영혼입
니다. 하나님께서 살려 놓으셨는데, ‘나’라는 인간 속에 중생한 영도
있고 부패성도 있습니다.
중생한 새 사람과 육체의 부패성인 옛 사람이 싸움
한 사람 가운데 중생한 영인 새 사람과 부패성인 옛 사람이 있습니
다. 새 사람과 옛 사람이 싸웁니다. 로마서 7장에 선을 행하고자 하지
만 악이 함께 하고 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아니하는 악만
행한다, 고 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중생한 영이 있기 때문에 새 사람이지만, 또 부패성이 있기 때문에 옛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옛 사람으로 살지 말고 새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중생한 영으로 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같이 하
십니다. 중생한 영 속에는 말씀이 내재해 계시고, 성령께서 내재해 계
십니다. 또, 외부에서도 말씀과 성령이 감동을 시키십니다. 중생한 영
의 안에서 성령과 말씀이 내재하심으로 역사하시고, 또 영 밖에서도
성령께서 감동을 시키시고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부패성은 마귀가 함께 합니다. 우리 속의 부패성은 마귀가 충동을
시켜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패성은 죄를 짓자는 것이고 중
생한 영은 성령과 합하여 의를 행하자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
는데, 중생한 영은 성령과 합하여 의를 행하자는 것이고 부패성은 마
귀와 합하여 죄를 짓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따라가야 하겠습니
까? ‘나’라는 사람, 그 마음과 육체가 어느 것을 따라가야 하겠습니까?
중생한 영을 따라가면 그것은 의를 행하고 부패성을 따라가면 그것은
마귀를 따라가는 것이 되어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옛 사람
을 죽이고 새 사람이 장성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옛 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죄악입니다.
갈라디아서 5:19에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
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
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하였습
니다. 옛 사람의 첫째가 음행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好色)
은 모두 성적인 죄입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 원수 맺는 것, 술 취하는
것 등 모두 19가지입니다. 술 한 잔 마시는 것도 옛 사람입니다. 새
사람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됩니다. 옛 사람
은 마귀를 따라 사는 것입니다.
중생한 영이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나야 함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바른 복음을 전해 주었는데, 아직도 젖이
나 먹고 밥을 먹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3:1에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
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
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
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지만 그들은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중생한 영이 자라나서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하겠는데, 아직 어린아이의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중생할 때는 어린 영의 상태이며, 점
점 자라나야 합니다. 장성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15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중생시켜 놓았으니 이제는 자라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 안에
서 참된 것을 하여 그에게까지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그
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까지 자라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처음에는 어린아이로 중생했지만 점점 자라나야
합니다. 어디까지 자라나야 할까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
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왜 자라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시기
와 분쟁으로 육신에 속했기 때문에 자라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물욕과 정욕과 사욕, 시기와
분쟁, 이러한 것들 때문에 자라나지 못하고 아직도 어린아이라고 했습
니다. 자라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과
성령으로 새 생명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분명히 새 생명을 받았지요?
받았으면 자라나라는 것입니다. 자라나지 못하고 내내 그대로 나아가
는 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죄송스러운 일입니다. 자라나야 합니다. 자
라나려면 육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제거해야 합니다. 옛 사람을 죽이
고, 쳐서 복종을 시켜야 합니다. 이기주의, 욕심의 사람, 정욕의 사람,
물욕의 사람, 이러한 것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과 말씀의 인
도를 받아서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서 장성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성한 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입니까?
어느 집에 아이가 여럿인데, 하나는 자라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저 겨우 뒤집기나 합니다. 아이들이 여덟 달이면 걸어 다녀야 합니다.
저는 창광교회 아이들을 보면 몇 달이나 되었느냐, 고 물어봅니다. 그
리고 여덟 달에 걷지 못하면 책망을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통은 여
덟 달이면 걸어 다녀야 합니다. 그런데 걷지도 못하고 세 살 나도 굴
러다니고 열 살 나도 굴러다니고 스무 살 나도 굴러다니고 마흔 살
나도 굴러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자신은 자라나지 못하면서 다
른 사람의 무엇이 틀렸다고 폄론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아직도 굴
러다니면서 말입니다.
넉 달 난 것도 굴러다니고 한 살 난 것도 굴러다니고 열 살 난 것
도 굴러다니고 마흔 살 난 것도 굴러다니면, 그 부모가 얼마나 걱정이
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지금 말한 이 상황보다 조금
이라도 낫게 보실 것 같습니까? 우리는 몇 살 났습니까? 신앙의 연령
이 몇 살입니까? 잘 걸어 다니십니까? 달음박질 잘하세요? 몇 십 년
되었어도 아직도 걸어 다니지 못하고 자라나지 못한 아이의 상태로
있는 사람, 큰일 났습니다. 신앙의 연령이 스무 살, 마흔 살이 되었는
데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시겠습니까? 생
각해 보십시오.
우리 기도원이 이곳으로 옮겨 온 지가 금년이 13년째입니다. 그 전에 고천기도원에서 18년을 보냈으니 이제까지 31년입니다. 또, 그 전에 삼각산, 관악산 다 합하면 신앙 연령이 40~50세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40~50세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자라났는가, 보면 자
라나지 못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처럼 육신의 소욕이 있기 때문에 자
라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젖이나 먹여야 잘
먹지, 단단한 음식은 먹일 수가 없어서 먹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자
라나려면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또, 자라나면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젖이나 먹고는 건강 유지를 할 수 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젖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잘 자라납니다. 그러나 아이
들의 나이가 들어가면 젖만 먹여서는 안 됩니다. 이유식을 먹이다가
그 다음에는 단단한 식물인 밥이나 빵 같은 것을 먹여야 합니다. 그러
므로 자라나려면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5:12-14에 “때가 오래므로 너
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교
역자들은 교인들에게 신, 구약 성경을 단단한 식물로 먹여 주어야 합
니다. 그래야 자라납니다. 또, 자라난 사람은 그것을 먹어야 합니다.
젖이나 먹어 가지고서는 안 됩니다. 신, 구약 성경을 초보적인 교리로
가르치는 것이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으면 된다, 믿
으면 된다”, 여기까지만 인도하는 것이 젖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그러
나 단단한 식물은 거기서 좀 더 진보하여 성경 말씀에 대한 깊은 해
석과 신령한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해석하여 신령한 뜻으로 먹어야 자기 영이 힘을 얻고 자라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합니다. 젖이나 먹어서는 안 됩니다. 교역자들도 밤낮 초보적인 것만 하지 말고 단단한 식물을 먹여야 성도들이
자라납니다.
‘노아의 방주’를 젖으로 먹이려면 “예수 믿는 사람은 다 방주에 탄
것이다”라고 하면 됩니다. 그러나 단단한 식물로 먹이려면 “예수를 믿
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인격을 만드는
것이 방주 짓는 일이다, 예수를 믿고 예수의 형상대로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방주 짓는 일이다”, 이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홍수는 환난
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자기 실력을 만들어 나가야 앞으로 환난을 이
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단단한 식물을 먹이는 것입니
다. 모든 성경 말씀을 단단한 식물로 먹일 수 있고 또, 젖으로 먹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나이가 얼마나 되었기
에 아직도 자라나지 못하고 아이 상태로 있습니까? 작년보다 조금 자
라났습니까?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나지 못하는 것은 육의 사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즉, 영의 사람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자라나지 못
한 것입니다. 중생한 영을 써서 영의 양식과 단단한 식물을 먹고 소화
시키어, 그러한 노력으로 점점 자라나서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와서
이루어지고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자라나
고 의가 자라나고 지식이 자라나고 영이 자라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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