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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지키는 복음의 섬… ‘바이블랜드’ 짓는다
한때 인구 90%가 기독교인 백령도 복음화의 비결
국민일보 입력 2018-08-24 18:18

http://m.kmib.co.kr/view.asp?arcid=0923996873&code=23111111&sid1=chr



남한 최초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인 중화동교회 전경.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백령도 교계와 인천 옹진군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바이블랜드’ 조감도.

김주성 백령한사랑교회 목사가 지난 21일 새벽기도회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다.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용기원산 끝섬전망대에서 바라본 백령도 전경. 백령도=강민석 선임기자

최근 백령도의 선교역사를 재조명하는 사업이 추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인천 옹진군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명 ‘바이블랜드’ 사업이다. 지난해 주민 및 교계 설명회를 거친 이 사업은 300억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다. 29만㎡ 부지에 근현대사 문화공원과 선교역사관, 백령전시관, 카페 등이 들어선다. 백령도 선교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제작할 예정이다.

지난 22일 백령도 백령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난 김주성(백령한사랑교회) 목사는 “공식적으로는 한국의 개신교가 1894년 9월 20일 알렌의 입국으로 시작되지만 하나님께선 이미 반세기 전부터 한국선교를 위해 섬세하게 준비하고 계셨다. 그 중심에는 서해안, 특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인 백령도가 자리 잡고 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바이블랜드 완성을 위해 발로 뛰고 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곳이 바로 백령도라는 말을 주민들에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조사해 보니 한국교회 역사에서 백령도의 선구적인 역할은 평범한 것이 아니더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는 옹진군 관계자를 만나 백령도를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펴 왔다. 목회자들에게도 협조를 구했다. 백령도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땅이었음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게 김 목사를 비롯한 현지 교계의 한목소리다.

백령도엔 왜 기독교인이 많을까

백령도 교계에 따르면 백령도는 원래 인구의 약 90%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복음화율이 높았다. 하지만 믿지 않는 외지인들이 들어오면서 복음화율이 감소해 현재 60% 정도가 교인이다. 주일에 주민 대부분이 교회에 있어 외지인들이 문을 여는 식당을 찾기 힘들 정도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를 기원하는 의식인 풍어제나 마을의 풍요를 비는 당산제가 사라진 지는 오래됐다. 주민들은 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백령도엔 현재 군인교회 2곳을 포함해 12개 교회가 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중 4개 교회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백령도의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는 먼저 지정학적 위치를 꼽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서구의 선교사들이 중국의 육로를 통한 사역의 길이 막히자 자연스레 뱃길을 이용해 백령도에 상륙했다. 백령도는 당시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때문에 백령도는 초기 한국 기독교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816년 영국 해군 H J 클리포드와 바실 홀이 백령도에 상륙했다. 서해안 일대의 해로(海路) 작성과 탐사를 하기 위함이다. 이들은 백령도 주민들에게 한문성경을 나눠줬다. 한국교회 최초의 성경 반입이었다. 1832년 귀츨라프 선교사는 백령도 주민에게 한문성경을 전하고 복음을 전했다. 이어 충남 고대도와 전북 군산, 금강 입구 등지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백령도 중화동교회에서 만난 조정현 목사는 “당시 성경이 구문으로만 전해져 안타깝다”며 “백령도에 처음 교회가 설립된 것이 1898년이고 당시 성경보존의 효용가치가 없었던 데다 국법에도 위배돼 보존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1896년 설립된 중화동교회는 남한 최초의 자생교회이자 백령도의 모교회다. 1894∼95년 갑오경장이 일어나고 자연스레 신문물인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백령도 참사 벼슬을 지냈던 허득과 유배를 온 김성진, 황학성, 장지영 등이 이듬해 서당에 중화동교회를 설립했다. 당시 이 교회 당회장은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한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교회 앞 기념비에는 1900년 11월 언더우드 선교사가 교인 7명에게 세례를 베푼 기록이 남아있다.

백령도에 온 피란민 대다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다. 지정학적으로도 연관이 있다. 조 목사는 “북한을 코앞에 두고 최북단인 접경지역에서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주민에게 적극적인 구원관과 하나님 유일신 사상의 체계를 갖춘 기독교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천안함 사건 상처 딛고 예전 모습 되찾아

6·25전쟁을 전후해 좌우 대립이 거의 없었다는 일화는 백령도 주민들의 민심과 신앙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백령도 교인들은 북한 인민군 치하 3개월간 아무 탈 없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인민군이 ‘북한헌법에 따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말을 믿고 피란을 가지 않았던 것이다. 인민군은 국군이 들어오기 직전 북한에 돌아갈 수 있도록 협력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교인들은 배 한 척을 마련해 인민군들을 무사히 돌려보냈다.

조 목사는 “당시 좌우 대립으로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 백령도의 상황은 정말 특별한 거였다. 아마도 기독교의 영향과 백령도 주민의 단결이 그런 사랑의 결실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전했다.

백령도 교회들은 복음전파에 열심이다. 매년 8월 15일 민·관·군 연합예배를 드린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마음으로 기도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매월 셋째 주 금요일 저녁엔 각 교회를 돌며 연합기도회를 연다. 11월 마지막 주일엔 부흥강사를 초청해 영적 성장을 도모한다.

2010년 3월 백령도 인근에서 천안함이 침몰했다. 온 국민에게 큰 상처였다. 백령도를 찾는 관람객의 발길은 오랫동안 끊어졌다. 지금은 남북 긴장이 완화되는 가운데 점차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다.

조기연 아세아연합신학대 북한연구원장은 “백령도를 통해 복음이 남과 북으로 확산돼 나간 것처럼, 이제 백령도를 통해 남북이 하나 되는 역사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새롭게 떠오르는 서해안 시대에 발맞춰 한국교회사에 백령도가 새롭게 재조명되는 것은 그런 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백령도=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